기술을 얘기한다 2007.02.02 13:57

/* (저자 주) 1995년 11월에 모 잡지에 기고한 글입니다. */

다사다난했던 1995년을 보내며

갑자기 내린 겨울비로 거리를 아름답게 수놓던 노오란 은행잎들이 땅에 좌악 떨어졌다. 일본 사람들이 잘 쓰는 표현 중에 '비에 젖은 낙엽' 이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쓸모도 없는 것이 치우려고 해도 잘 치워지지 않는 다는 뜻이다. 정년 퇴직후 아내에게 매달려 사는 불쌍한 일본의 노인들을 가리키는 표현이기도 하다. 한때 사회를 위해서, 가정을 위해서 혹은 자신을 위해서 전력질주해오던 사람들도 어느 시기가 지나고 나면 청소부들을 괴롭히며 구박만 받는 신세로 변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어느 경전에 보면 '해가 동쪽에서 뜨지만 밝아오는 것은 먼 서쪽부터' 라는 표현이 있다. 서양속담에는 '한 시대의 위대한 사상도 그 다음 시대의 상식' 이라는 표현도 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사람도, 기술도, 사상도, 제품도 그 시대가 지나고 나면 다 일장춘몽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렸다.

이런 거대한 운명의 수레바퀴는 흡사 돈키호테가 덤벼들던 풍차와 같이 어떤 사소한 도전도 용납하지 않는다. 지난 수십년간 컴퓨터의 대명사로 군립해왔던 아이비엠도 이제는 점점 그 존재를 잃지 않으려는 노력이 눈물겨울 정도의 비참한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다.

어떤 해도 연말이 되면 어김없이 '다사다난' 이라는 수식어구로 치장되고 한다. 올해도 그런 점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기억하기조차 몸서리쳐지던 '삼풍대참사', '대구참사' 등의 국내 사건 뿐만 아니라 가까이는 북한주민들이 엄청난 큰물로 먹고 사는 것조차 힘겨운 상태가 되었으며 미국에서 발생한 '월드 트레이드 센터의 폭발' 도 올해를 다사다난케하는 요인 임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해를 마감하는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에 우리는 여전히 서글픈 소식을 듣고 있다. 멀리 독일에서는 역대정권으로부터 대대로 압박을 받으면서도 조국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았던 이 시대의 위대한 음악가인 윤이상 교수님이 돌아가셨고, 중동 평화를 앞당긴 공로로 노벨 평화상까지 받았던 이스라엘의 라빈 총리는 동족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꼭 필요한 사람일수록 먼저 데려가시는 것도 하나님의 섭리였던가.

펜티엄 그리고 그 이후

각설하고, 올해의 컴퓨터 시장을 돌아보면 386 피씨 시장을 무르익기도 전에 대체하였던 486 피씨도 펜티엄의 위력에 이미 시장성을 잃고 있다. 물론 이를 촉진하는 가장 강력한 힘은 멀티미디어에 대한 관심의 고조라고 해야할 것이다. 더구나 기존의 486 피씨급 이하에서는 하드웨어적인 방법에 의해서만 볼만한 동영상 ( 특히, 엠펙 동영상 - 예를들어 비디오 씨디 ) 을 볼 수 있었던 것에 반하여 펜티엄 75 메가헤르츠 이상에서는 소프트웨어만 가지고도 동영상을 볼 수 있다는 점이 펜티엄의 급부상을 가능케 하였다.

인텔은 펜티엄을 처음 내놓은 지 얼마 있지 않아 발견된 소수점 이하 자리수 계산 상의 결함 문제로 상당한 고전이 예상되었으나 브랜드 이미지가 갖고 있는 위세에 힘입어 쉽게 정상을 지키고 있다. 인텔이 내년 시장을 목표로 시제품을 내놓고 있는 '펜티엄 프로' 는 이미 수많은 업체가 채택할 것을 선언하고 나선 상황이어서 내년에도 인텔의 독주가 예상된다. 하지만, 펜티엄 프로는 32비트 운영체제 전용으로 개발되었기 때문에 32비트 운영체제가 아닌 기존의 윈도우즈 3.1 이나 사이비 32비트 운영체제인 윈도우즈95에서는 별로 성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펜티엄 프로를 장착한 피씨에서 일부 네트웍 카드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결함이 발견되어 또 한차례 인텔로서는 고전을 치러야 할 것이다.

한편, 인텔의 독주에 제동을 걸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는 사이릭스사 ( Cyrix ) 에서는 펜티엄 호환이면서 속도는 펜티엄 프로보다 빠른 M1 이라는 칩을 내놓을 것으로 알려져 내년에는 사이릭스사의 분전이 예상된다.

마이크로소프트와 애플의 명과 암

이 글이 잡지에 실리게 될 때 쯤이면 이미 발표가 되었겠지만 아직 발표가 되지 않은 한글판 윈도우즈95 의 한글코드 문제는 여전히 컴퓨터 호사가들 사이의 논쟁거리이다. 얘기의 발단은 처음 윈도우즈95 에 대한 얘기가 나왔을 때 이 새로운 운영체제에서는 문자처리코드로서 유니코드 ( Unicode ) 라는 국제표준을 채택하게 되며 따라서 영문은 물론 한글, 한자, 일본글자 등 지구상의 거의 모든 문자를 표현하고 처리하게 될 것이라고 알려졌다.

하지만 막상 한글 시험판에서는 한글완성형을 사용하였고 이에 사용자들의 항의가 있자 기존의 완성형에서 표현하지 못하는 글자를 땜빵식으로 추가한 확장완성형을 사용하였다. 하지만 이 확장완성형은 정상적인 문자코드로 보기 어려운 문제점 ( 특히, 글자를 가나다 순으로 정렬하는데 문제가 있다 ) 이 있어서 더 큰 반발을 불려일으켰다. 그러자 다시 확장부분을 입력할 수 없도록 수정한 것을 최종으로 내놓았는데 내부 처리 방식에는 확장부분을 처리하는 부분이 그대로 있어서 입력 프로그램만 예전 것을 쓰면 여전히 확장부분을 입력할 수 있게 되었다. ( 이 문제에 관하여 한국마이크로스프트사에서는 확장부분을 전혀 쓸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

이 과정을 살펴보다 보면 애초에 잘못 만들어진 1987년판 한글코드 ( KSC5601-1987 ) 와 이를 땜빵식으로 수정했던 1992년판 한글코드 ( KSC5601-1992 ) 가 갖고 있는 한계와 함께 확장완성형 코드를 처리할 수 있는 장치 ( 특히, 프린터 ) 를 개발하지 못하고 있는 안이한 자세의 한국 기업들, 자신의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이랬다 저랬다하는 외국기업 등 여러가지를 문제점으로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새해에는 깨끗이 정리가 되었으면 좋겠지만 뚜렷한 대안을 아무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여전히 암담할 뿐이다. 마이크로소프트와 인텔의 독주에 제동을 걸 수 있을 것으로 보였던 애플사는 올해에도 별 재미를 못보았다. 하지만 하반기에 들어 파워칩을 내장한 파워맥을 저가에 공급함으로써 어느정도 회복을 해나가는 상황이다.

한편, 국내의 출판시스템 개발 업계에서는 쿼크 엑스프레스 ( Quark Xpress ) 를 탑재한 애플사의 매킨토시가 독식하고 있는 탁상출판시스템 ( DTPS : Desk Top Publishing System ) 시장을 어떻게든 나눠먹어 보려고 공동보조를 맞추기로 하였다고 한다. 뒤늦은 감이 있긴 하지만 가장 늦었다고 생각될 때가 가장 빠를 때라고 했던가 ? 국내업체의 선전을 내년에는 기대해 본다. 이 글의 머리에서도 썼지만 그 어느 것도 영원한 것은 없다. 인텔과 마이크로소프트의 멸망을 내 살아 생전에 볼 수 있을지. 아니면, 예외없는 법칙은 없다고 인텔과 마이크로소프트가 예외가 될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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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