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을 얘기한다 2007.02.02 13:59

/* (저자 주) 1996년 4월에 모 잡지에 기고한 글입니다. 그 때 제가 대리였군요. ^^ */

지금은 서기 2025년, 나는 유전공학을 이용해서 각종 난치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품을 개발하는 회사의 연구원이다. 오늘은 지난 번에 집게벌레의 유전인자를 이용해서 개발한 근육무력증을 치료제의 시제품을 임상실험하기로 되어있는 날이다. 말이 임상실험이지 사람을 이용해서 실험을 하는 것은 아니고 정교하게 프로그램 된 인간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에 화학성 분에 대한 자료를 넣는 것으로 실험은 끝난다. 우선 이 프로젝트에 같이 참여하고 있는 지그프리드와 야마다를 불러야 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2010년대에 전세계 모든 국가가 동시에 투자하여 전지구를 광케이블로 뒤덮다시피 한 GII ( Global Information Infrastructure ) 계획 덕분에 큰 회사는 대부분 세계 각지의 인력을 네트웍으로 연결한 가상 회사 ( Cyber Company ) 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지그프리드와 야마다를 불러줘"

그러자 벽면에 있는 큰 화면의 한 귀퉁이에 야마다의 얼굴이 나타났다. 쉰 살의 나이는 못 속이는 듯 깡마른 얼굴이지만 그의 눈만은 항상 새로운 기술에 대한 열의로 이글거리고 있다.

"잘 지냈나 ?"

"그럼. 그래 오늘은 무슨 일로 불렀나 ?"

"<집게-1>에 대한 시뮬레이션에 대해 토론하자고 불렀네. 그런데 참, 지그프리드는 왜 응답이 없지 !"

나는 한국말로 말을 하지만 지능망 Intelligent Network 에 내장된 자동 번역 프로그램이 일본어로 번역을 해주기 때문에 대화를 나누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다. 가끔은 야마다가 한국말을 전혀 못한다는 사실을 잊을 때도 있다. 이때 화면의 다른 귀퉁이에 지그프리드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런데 실제 얼굴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작년에 플로리다에서 낚시할 때 찍은 사진이었다.

"무슨 일인가 지그프리드 ?"

"한밤중에 사람을 부르시다니요. 전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저에게 대신 전하시지요."

지그프리드가 아니라 에이전트 Agent 가 대신 대답하였다. 아마 에이전트에게 대신 일을 맡겨 놓고는 잠을 자고 있거나 친구들이랑 술이라도 한 잔 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에이전트는 ( 컴퓨터와 통신 장비를 포함하여 ) 모든 가전제품에 내장된 소프트웨어의 일부분으로서 사용자의 요구에 따라 적절히 대응하여 일을 처리하도록 되어있는 인공지능 프로그램이다. 지그프리드가 대신 내세운 할-파이브HAL-5 라는 에이전트는 전문 연구자들이 애용하는 모델이다. 나는 속으로

'짜식, 에이전트 치곤 굉장히 겸손한 말씨를 쓰는 군'

하고 생각하며,

"그럼 시작하지."

우선 인간 시뮬레이션을 제공하는 컴퓨터에 접속을 한 다음 우리가 개발한 약에 대한 정보가 있는 데이터베이스와 연결한다. 그러자 잠시 후, 결과 자료가 나의 데이터베이스에 기록되기 시작한다. 컴퓨터 기술의 놀라운 발달로 자료의 처리는 무한정 빨라지고 있지만 그 자료를 검토하는 사람의 능력에는 별로 발전이 없어서 일단 결과를 데이터베이스에 받아놓고 찬찬히 검토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쓰이는 방법이다. 한참을 기다리는 결과 자료가 다 도착하였다. 아무리 컴퓨터가 처리를 빨리 한다 하더라도 인간처럼 복잡한 유기체를 시뮬레이션 한다는 것은 아직은 어려운 문제임에 틀림이 없다.

나는 '마당쇠' ( 내 에이전트의 이름. 부지런히 돌아다니면서 자료를 모아준다고 붙여준 이름이다. ) 에게 명령을 내린다.

"결과를 보자."

나의 에이젼트 프로그램은 내가 주로 하는 일에 대한 자료를 갖고 있기 때문에 데이터베이스의 결과 자료 중에서 내가 보고 싶어하는 자료만을 걸러서 갖다 준다. 나를 그 자료를 내 컴퓨터 화면에서 다시 정리한다. 정리한 결과가 틀린 곳은 없는 지 검토한 다음 버튼을 누르자 벽에 있는 화면에 결과가 표시된다. 아마 야마다도 이 그림을 똑같이 보고 있을 것이다. 여러 명의 사용자가 동시에 같은 칠판을 공유하는 이 디지털 화이트보드 Digital Whiteboard 기능은 우리와 같이 전문적인 연구를 하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일반 직장인들의 원격 회의나 학생과 교사를 연결하는 원격 교육에서도 널리 활용되고 있다. 심지어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도 이 디지털 화이트보드를 이용하고 있는데, 지난 서기 2000년 1월 1일 아침에 각국에서 참가한 수백 명의 유명 화가들이 동시에 지구의 평화를 기원하는 하나의 그림을 그린 사건은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똑똑히 남아있다.

"내가 검토한 자료와 자네가 보내온 자료에 따르면 몇 가지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는 것 알 수 있네. 시뮬레이션 레벨을 높여서 더 정교한 결과를 받아야 할 걸세."

잠시 회상에 잠겨있는 동안, 야마다의 날카로운 평가가 날아오기 시작하였다. 이런 회의 자료는 모두 우리 회사의 데이터베이스에 영상 자료로 기록되어 관련된 연구를 하고 있는 모든 연구자들에게 공개되기 때문에 허튼 소리를 해서는 안된다. 한참 동안의 회의를 마치고 나는 접속을 끊었다. 왜냐하면, 마당쇠가 중요한 약속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우리 동네에서 노래자랑이 있는 날이고 나도 출전해서 한 곡을 불러야 할 뿐만 아니라 기타 반주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사무실로 쓰이는 내 방에서 나와서 거실로 갔다. 거실 창문으로는 멋진 바닷가 풍경이 펼쳐져 있다. 사실은 창 밖 풍경이 아니고 위성을 통해서 전송되고 있는 남태평양의 어느 섬의 풍경이다. 나는 기타를 둘러메고 마당쇠에게 우리 동네 노래자랑 시스템에 연결해달라고 명령했다.

창에 비친 화면이 바닷가 풍경에서 사이버공간 Cyberspace 에 마련된 우리의 공연 무대로 바뀌었다. 거실의 조명도 공연 무대를 흉내내어 어두컴컴해 졌다. 각종 가전제품에 들어있는 에이전트들이 네트웍을 통해 정보를 주고받고 있기 때문에 굳이 사람이 조명을 바꾸거나 할 필요가 없이 메인 에이전트인 마당쇠에게 명령만 내리면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공연 무대에는 기타를 둘러멘 내 모습과 다른 집의 거실에서 똑같은 짓을 하고 있는 우리 밴드의 다른 멤버들의 모습이 보인다. 흡사 한 공연 무대 위에 모인 듯 하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종류의 가상 현실 기술은 컴퓨터 처리속도의 한계 때문에 해상도가 나빠서 게임에만 활용되었지만 최근 광 컴퓨팅 Optical Computing 기술의 발전으로 이제는 어느 가정에서나 이런 가상 현실을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몇 년 지나지 않아 세계 각지에 흩어진 사람들이 한 공간에 있는 것처럼 만날 수 있는 완벽한 가상 현실을 구현할 수 있는 시대가 올 것이다. 나는 마당쇠에게 의상이 마음에 들지 않으니 무대용 의상으로 바꿔달라고 했다. 마당쇠는 내 취향에 맞는 무대의상을 잘 알고 있다. 텍스쳐 매핑 Texture mapping 기능을 이용하여 공연 무대에 비친 내 의상을 화려한 무대의상으로 바꿔주었다. 컴퓨터 그래픽에서 제한적으로 쓰이던 텍스쳐 매핑 기능이 이런 실시간 동영상 처리에 활용되기 시작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나는 자연스럽게 매핑이 이뤄지는 지가 미심쩍어서 앉았다 섰다하고 팔도 흔들어 보았다. 내가 보기에는 별로 완벽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내가 무대의상을 직접 입고 있는지 아니면 매핑을 활용하는지 구별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아 안심되었다.

"지금으로부터, 제 5 회 금천3지역 동네 노래자랑을 시작하겠습니다."

1990년대의 낡은 필름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촌스러운 복장을 한 빵집 아저씨가 아주 고풍스러운 말로 오프닝 멘트를 하였다. 곧이어, 전자밴드의 화려한 타이틀 곡이 연주된다. 나도 열심히 기타를 연주하고 있다. 비록 가상 현실 Virtual Reality 기술이 완벽한 수준에 올라있지는 않지만 우리 동네의 어디선가 연주하고 있을 밴드의 각 구성원이 연주하는 모습이 화면으로 합성되어 나오고 연주하는 음악도 한 자리에서 연주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에 상당한 실감이 난다.

정보 통신 기술이 아무리 발달하여도 물체를 통신으로 전송하는 것은 앞으로 몇만 년은 더 기다려야 할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전세계 모든 사람들과 눈앞에서 보는 것처럼 통신을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실제로 만나서 따뜻한 정담을 나누고 식료품을 가져다 팔거나 신선한 음식을 파는 것은 여전히 동네 안의 가게에서 이뤄지고 있기 때문에 이웃사촌의 필요성이 어느 시대보다도 더 커져 있는 현실에 비춰볼 때 우리 동네의 노래자랑은 사람들을 엮어주는 좋은 계기가 되고 있다. 공연도 성황리에 끝나고 나는 기타를 벗어놓고 샤워를 한 다음 침대에 누웠다. 조명은 자연스럽게 어두워지면서 멀리서 파도 소리가 들려온다. 바다는 모든 생명체의 영원한 고향이라는 말이 사실인 듯 파도 소리만 들으면 자연스럽게 잠이 온다.

. . .

"고대리, 고대리. 점심시간 끝났네. 이제 일어나지."

어깨를 흔들어 깨우는 과장님의 목소리에 잠을 깬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20세기말에 유행하던 구형 컴퓨터의 모습이다. 앗 이럴 수가 ? 꿈속에서 드디어 과거에 왔구나 ! 나는 늘 꿈속에서나마 21세기 이전의 생활을 맛보았으면 하는 소원을 갖고 있었는데. 그런데 이게 21세기의 내가 20세기의 꿈을 꾸는 건가 ? 아니면, 20세기의 내가 21세기의 꿈을 꾸었던 건가 ? 그것도 아니면 어느 세기의 내가 21세기의 나를 꿈꾸고 그 속에서 다시 20세기를 꿈꾸고 있는 건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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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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