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얘기한다 2007.02.02 14:03

/* (저자 주) 1996년 6월 모잡지에 기고한 글입니다. 그때도 세상이 빨리 돌아간다고 했는데 지금은 더 빠르지요. */

겨울이 지나고 이제 좀 더워지나 싶더니 이번 주부터 장마라니. 정말 세월은 유수처럼 흐른다. 우리나라에서 여름에 비 오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 미친 듯이 내린다는 느낌이 든다. 이 비가 사시 사철 골고루 내리면 써먹기 좋으련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유주현과 같은 섬세한 사람이야 이렇게 쏟아지는 비를 "하도 장하게 내리시는 비"라고 표현할 수 있겠지만 그저 흘러내리는 땀을 주체하지 못하고 벽에서 스며드는 곰팡내에 질겁하는 나 같은 범인이야 그런 비를 즐길 여유가 있으랴.

비 얘기는 집어 치고 컴퓨터쪽 사람들은 어떻게들 사나 눈을 한번 돌려보자. 요 몇 년 사이에 모든 사람들이 입에 주문이라도 들린 듯 외고 다니던 그룹웨어, 인터넷과 같은 말들이 채 시장을 제대로 형성하기도 전에 인트라넷이니 데이터 웨어하우징이니 하는 새로운 개념들이 소프트웨어 시장의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애플 뉴턴의 실패 이후로 당분간은 잠잠해 질 듯 했던 PDA ( Personal Digital Assistant : 전자 수첩처럼 작고 정해 진 기능을 쓰지만 통신 기능이 있어서 개인용 컴퓨터와 자료 호환이 되는 장치 ) 시장도 광범위하게 일상화되고 있는 개인휴대통신 ( PCS ), 무선 데이터 통신, 위성 통신 등에 힘입어 그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있다. 한편 더 싸고 더 쓰기 쉬운 컴퓨터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의 노력은 네트웍 컴퓨터 ( NC : Network Computer : 미국 오라클사의 엘리슨 회장이 주창한 개념. 40만원 대의 컴퓨터로서 필요한 프로그램을 자체적으로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네트웍에서 가져다 쓴다. ) 와 SIPC ( Simply Interactive Personal Computer : 미국 마이크로 소프트사의 빌 게이츠 회장이 주창한 개념. 역시 싼 가격을 장점으로 내세우고 있으며 별도의 부팅 과정 없이 켜서 곧바로 쓸 수 있게 한 것이 기존의 PC와 다르다. ) 라는 괴상한 상품으로 올 연말이나 내년 쯤 찾아올 듯 하다. 이런 새로운 시스템들은 거의 예외 없이 자바 ( Java ) 라는 새로운 컴퓨터 언어 ( 또는 운영환경 ) 를 채택할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어느 기업 연구소에서건 "자바 잡아라" 하고 쫓아다니느라 난리들을 치고 있다. 바야흐로, C & C ( Computer and Communication ) 의 시대에서 M & M ( Mobile & Multimedia ) 의 시대로 이행하고 있는 것이다.

광속의 상거래라는 말의 약칭으로 통하고 있는 칼스 ( CALS : Commerce At Light Speed ) 나 동시공학 ( CE : Concurrent Engineering ) 이라는 말도 많은 회사들 ( 특히 제조업 ) 을 중심으로 새로운 목표로 등장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앨빈 토플러가 프로슈머 ( prosumer = producer + consumer 즉, 소비자인 동시에 생산자인 사람 또는 개체 ) 라는 메타포어로 표현했던 "소비자에 의해 생산이 주도되는 시대" 또는 "생산과 소비의 사이클이 무한히 좁혀 지거나 거의 없어지는 시대"를 향한 광속의 질주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시간과 싸우고 있는 가를 보여주는 사례를 한번 인용해 보자.

    최근에 나는 일본 최고의 환 딜러들 중 한 사람과 담소를 나누면서 그가 환을 매도할 때와 매수할 때 고려하는 요인들을 지적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여러 요인들이 있지요. 때로는 매우 단기적인 요인도 있고, 일부는 중기적인 요인들도 있고, 또 일부는 장기적인 요인들도 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가 장기적인 요인들도 고려한다고 말한 데 대해 매우 흥미를 느껴 장기적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의 시간대를 의미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아마 10분 정도 될 겁니다" 라고 매우 진지하게 말했다. 오늘날 시장은 그렇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교텐 도우와 폴 볼커의 "변화하는 부" 중에서

한편, 보스턴 컨설팅 그룹의 조지 소트크 2세와 토마스 하우트는 <시간과의 경쟁 : 세계시장의 재형성> 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표현하였다.
    "대부분의 제품과 서비스는 실제로 그들 회사의 가치전달 시스템 내에 있는 시간에 대하여 단지 0.05 - 5% 만의 가치를 갖고 있다."
다시 말해서 대부분의 회사원들은 평균적으로 95 - 99.95%의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얘기이다. 예전에는 별반 심각하게 여기지 않던 모든 생산 과정에 대하여 드디어 칼을 들이대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상황은 또 어떤가 ? 기억력이 좋은 사람들이라면 1987년을 기점으로 수많은 사무전문직 노조가 만들어 진 것을 기억할 것이다. 한편으로는, 1987년에 있었던 6.10 민주시민항쟁과 그 무렵에 등장했던 명동성당 주변의 소위 "넥타이 부대"에 힘입은 바 크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무전문직 노동의 노동생산성이 생산직의 노동생산성보다 회사의 수익에 차지하는 비중이 1985년경을 기점으로 더 커지기 시작했고 따라서 사무전문직 노동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제도가 이 시기에 가동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많은 노조가 만들어 지게 되었다는 사회과학자들의 지적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블루 칼라의 시대에서 화이트 칼라의 시대로 넘어간 것이다.

그러나 얘기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제 또 새로운 시대가 오기 시작하였다. 골드 칼라의 시대가 그것이다. 기술자를 나타내는 영어 단어는 엔지니어 ( engineer ) 다. 그것은 아마도 산업혁명을 가능케 했던 원동력 즉, 증기기관을 이용하여 사람의 힘보다 훨씬 강하고 지속적인 힘을 내는 엔진의 위력을 새삼 느끼게 하는 단어이다. 하지만 더 이상 새로운 기술을 만들어내는 기술자들을 엔지니어라고 불러서는 안된다. 골드 칼라의 중심에는 똑같은 것을 조금도 지겨워 하지 않고 무한히 복제해내는 '엔진' 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 하나라도 똑같은 것을 만들어 내지 않으려는 상상력 ( imagination ) 이 있는 것 이다. 그래서 이제 그들은 이매지니어 ( imagineer ) 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면 왜들 이 난리인가 ? 전부 광기가 들어서 그런가 ? 그렇지 않다. 작년에 우리 수출 경제의 견인차는 역시 반도체였다. 올해도 여전히 그럴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믿었다. 그러나 요 며칠 사이에 모든 것이 변해버렸다. 개당 50불씩 하던 16메가디램이 12달러 수준으로 떨어진 것이다. 수많은 반도체 메이커들이 수익의 목표를 대폭 줄이고 있으며 어떤 회사는 어떻게든 적자만 면해보자는 수준으로 떨어졌다. 그런데다가 미국이나 일본과 같은 기술선진국들은 대만에다가 기술이전을 함으로써 더 싼 단가로 메모리를 생산하려고 한다.

    바다가 잔잔했을 때에는

    모든 배들이

    잘도 떠다녔더라.

셰익스피어

경기가 좋을 때 돈 버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경기라고 하는 것은 좋았다, 나빴다 사이클을 타기 마련이다. 하지만 점점 그 사이클의 폭은 좁아지고 깊이는 깊어지고 있다. 그러니 한번 깊은 골에 빠지면 다음 번 경기 좋을 때까지 버티지 못한다. 아니 오히려 버티면 더 큰 피해만 입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런 광기의 시대를 극복하기 위해서 그 누구도 쫓아올 수 없는 그 무언가를 잡으려고 안간힘이다.

당신은, 당신의 회사는 이 광기의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무엇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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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