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얘기한다 2007.02.02 14:24

/* (저자 주) 1997년말 모든 사람들의 입에 IMF가 오르내리던 그 시절에 열받아서 쓴 글 2탄입니다 */

1. WTO 체제와 경쟁력 그리고 지방자치

1-1. WTO 체제와 다국적 자본

흔히들 우리의 산업을 '고비용 경제구조'라고 얘기한다. 경제뿐만 아니라 엄청난 정치 관련 비용이나 사교육비에서도 이 '고비용'이라는 말은 등장하기도 한다. 어쨌든 생산이라는 측면에서 고비용 구조는 전체 매출에서 원가가 차지하는 비용을 증대시킴으로써 이윤의 폭을 줄이는 역할을 하므로 백해무익하다는 것은 뻔한 이치다. 물론 자본가들은 고비용의 구조 안에서 노동자의 '임금'이 차지하는 비중을 부풀림으로써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요구를 억제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 고비용을 속을 들여다보면 노동자의 임금외에 다른 부분도 상당히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들어, 수송비용 ( 흔히 '물류비용'이라는 일본식 한자말로 얘기하는 것 ) 만 보더라도 교통 기반이 잘 구축된 나라에 비하여 수십배에 이른다는 통계는 흔히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이 문제는 개별 기업이 노력한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즉, 교통 기반에 대한 투자는 어차피 국가차원의 투자이므로 결국 중앙정부의 무능을 탓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고비용 구조는 '기나 고동이나 돈만 되면 뛰어드는' 한국 자본의 졸속 투자에서 비롯된다. 투자하려는 분야에 대한 기술도 없으면서 '돈만 때려부어서' 공장을 짓고 없는 기술은 외국에서 들여오고 규모의 경제로 밀어붙이는 현재의 구조에서는 그나마 그 분야에서 기술을 확보하고 있는 중소기업의 씨를 말려서 기술 자립의 기반을 와해시키는 동시에 해외로의 과다한 로열티 송금이라는 고비용으로 연결된다. 박정희 정권이나 전두환 정권때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 지켜지고 있던 대기업과 중소기업간의 사업영역 구분이 그 이후 급속히 무너지면서 국내의 자립기반은 말살되고 아무리 생산해봐야 이익율이 3%를 넘지못하는 생산에 매달리는 현재의 구조로 바뀌게 된 것이다.

어쨌든 자본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그 따위의 '고비용 구조'는 '내 알 바' 아니다. 왜냐하면 WTO 체제의 출범으로 자본의 국가간 이동은 거의 자유화 되었다. 따라서, 자본은 자기의 덩치와 고도화 수준에 맞는 국가를 찾아 가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소프트웨어를 만들고 싶으면 실리콘 밸리를 가면되고 봉제인형을 만들고 싶으면 중국으로 가면된다.

하지만, 노동자는 어떤가 ? 노동자의 국가간 이동은 제도나 관습이라는 측면에서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프로그래머들은 모두 실리콘 밸리로 가고 인형만들던 사람들은 모두 중국으로 가고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모두 스코틀랜드로 가란 말인가 ? 살던 고향을 버리고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말을 배우고 새로운 이웃을 사귀면서 살아가는 것이 가능한가 ? 한때 우리나라에 '산업연수생'이라는 이름으로 외국인 노동자들이 몰려온 적이 있긴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현상일 뿐 노동자들의 대대적인 이동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양보할 수 있는 최대한은 겨우 우리 나라 안에서 지역을 옮기는 수준일 것이다.

즉, 자기가 보유한 기술에 걸맞는 지역을 찾아가는 것이 현재 노동자들의 선택의 한계일 것이다. 따라서 한 국가내에서 각 지역자치체들은 자신의 특색을 갖추는 것이 필요한 상황이다. 그러면 각 지역자치체들이 고유성과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까 ?

1-2. 지역의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현대 자본주의 국가들의 운영논리는 외줄 타기와 같다. 외줄을 타는 사람은 중심을 잡기 위해서 긴 장대를 들고 있는데 이 긴 장대의 오른쪽 끝에는 '자유'라는 말이 왼쪽 끝에는 '평등'이라는 말이 씌어있다.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어느 한쪽으로 넘어지게 되고 그러면 나라 꼴이 말이 아닌 상황으로 가게 된다.

여기서 '자유'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번 것을 자기 것으로 할 수 있는 권리를 가리킨다. 한편 '평등'은 인간이 태생적으로 가질 수 밖에 없는 '불평등'으로 인하여 '자유'가 특정집단만의 '자유'가 되는 것을 막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이를 교통에 비유하면 이렇다. 도로에서 신호등을 모두 없애버린다면 자동차는 무한정의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빨간 불이 없으니 목적지까지 한번도 서지 않고 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자유 이데올로기'는 '효율성'에 의해 지지를 받는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길을 건너갈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동차보다 덜 단단하기 때문이다. ( 태생적 한계 ! ) 그래서 신호등이라는 것이 있어서 언제는 자동차만 그 외는 사람만 그 위를 지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즉, '평등 이데올로기'는 그 사회를 구성하는 인자들이 가진 다양한 차이를 극복하기 위한 장치다. 물론 평등을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면 자동차나 사람이나 길위에서 뒤섞여서 애초 도로를 놓고 자동차를 만든 '효용성'이 없어지게된다.

국가의 운영도 마찬가지이다. 생산 수단을 소유한 사람이 그 수단을 활용하여 돈을 버는 것은 자유다. 하지만 그렇게해서 축적된 부가 세습되거나 - 그럼으로써 가난도 세습되게 만들거나 - 다른 사람들의 자유를 침해할만큼 압도하는 것은 막아야 한다. 따라서, 많이 번 만큼 '세금'을 내게 하여 그 돈으로 부를 갖지 못한 사람들도 살 수 있도록 지원하여야 한다. 이 구조를 들여다 보면 '자유'를 지향하는 것은 '분산적'인 반면에 평등을 지향하는 것은 '집중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분산과 집중의 조화'가 곧 20세기말을 규정하는 세계질서인 것이다. (맨 아래의 주1 참고)

이런 틀을 가지고 우리나라를 보자. 우리나라도 지방자치를 하긴 한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를 굴리는 원료에 해당하는 돈 즉, 세수는 국세에 치중되어 있다. 따라서 모든 지방자치체는 중앙정부가 나눠주는 돈만 쳐다보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중앙정부가 아무리 비대해져도 이를 통제해줄 상대역이 없다. 정부는 '평등'의 논리를 내세우며 지방에는 돈을 쥐꼬리 만큼만 준다. 그러니 지자체들은 돈이 없어서 지역사회를 경영해나가기는 커녕 현상유지에도 급급하다. 물론 중앙에서 나눠주는 돈에 덜 의존해도 되는 부자 동네들은 좀 낫지만. 오죽하면 강남구나 서초구에서 보도 블럭을 교체할 때면 관악구나 구로구의 공무원들이 트럭대놓고 밤새 기다렸다가 실어간다는 우스개가 있을 정도니 말이다. ( 어떤 사람이 이게 사실이라고 했지만 나는 절대로 이를 사실로 받아들일 수 없다. )

어쨌든 우리가 어떤 지역에 살것인가를 정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 큰 차이를 주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너무나도 평등하지 않은가 ? 그런데 왜 하나도 행복하지 않지 ? 왜 행복하지 않은지를 학교교육을 비유로 생각해보면 이렇다.

우리나라처럼 평등교육이 잘 실현된 나라도 없다. 전국 어딜가도 똑같은 국정 교과서로 별반 차이도 없는 수준의 시설에서 도토리 키 만큼도 교육에 대한 열의나 실력이 차이가 나지 않는 교사들이 가르치는 나라니까 말이다. ( 일부 열의가 넘치는 존경스런 선생님들께는 대단히 죄송하지만 그런 분들이 무시할 만큼 소수라는 것도 사실이다. ) 오죽하면 어떤 사람은 현재의 평준화 정책을 '평둔화' 정책이라고 비꼬았을까 ? 그러나 정작 문제는 그래서 평등해졌는가 하는 것이다. 결코 아니다. 잘사는 집 애들은 공교육비의 수천 수만배에 달하는 사교육비를 지불함으로써 진학 - 즉, 부의 세습을 용이하게 하는 인증서의 확보 행위 - 에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사실아닌가 ? 교육에서의 평등은 결국 사적 영역의 개입을 통하여 '신분 세습의 자유'로 귀결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만약 평등하게 태어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서울에 있는 학생들이 시골에 사는 학생들보다 훨씬 더 많이 대학에 진학하는 것을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 서울이 물이 좋아서 그런가 ? 시골 애들은 농사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또는 다방 레지가 적성에 맞기 때문인가 ?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그러면 무엇인가 ? 사교육비를 포함하여 교육에 투자되는 교육재정의 분산과 집중이 이루어 지지 않기 때문이다. 돈 많은 사람은 학교에 돈을 더 내고라도 더 좋은 교육을 받게 해주고 그렇게 해서 거둬들인 돈의 일부를 가난한 이들의 교육에 투자하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 아닌가 ? 국가가 만약 사적영역에서 돌아다니는 검은 돈을 수거하여 공공의 이익을 위하여 쓰지 않는다면 어떻게 존립의 가치를 따로 찾을 것인가 ?

이상에서 우리는 우리나라가 지나치게 중앙으로 집중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유도 평등도' 모두 구현하고 있지 못함을 알게 되었다. 이제는 바꿔야 할 때다. 중앙정부를 과감히 개혁하여 축소하고 지방정부에게 재량을 이양하고 그들 지방정부간의 조절역할만을 중앙정부가 갖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 농민도 별로 없는 서울에 있는 농촌지도소도 없어질 것이고 '이런 식으로 해서는 안되겠다는 것을 알게된 것이 성과'라는 대전엑스포 운영재단도 없어질 것 아닌가.

2. 외국자본을 어떻게 볼 것인가 ?

2-1. 왜 갑자기 외국자본을 들먹이나 ?

최근 몇 달간 우리 정부의 가장 큰 과제는 해외의 자본을 한국에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우리 기업에 대한 주식의 보유 상한선을 높인다던지 인수와 합병을 쉽게 해 준다던지 부동산의 소유에 대한 규제를 풀어준다던지 하여 외국 자본이 우리나라에 많이 유입됨으로써 국가의 외환보유고를 확대하고 산업분야에 유통되는 자본의 양을 증대시키는데 주력하였다. 그 결과 달러화에 대한 원화의 가치가 어느정도 안정세를 찾고 있으며 주식시장은 연일 상종가를 이어나갔다. 게다가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가 TV에 나와서 우리나라에 유입된 외국자본의 비율이 다른 나라에 비하여 낮은 편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해외자본의 유입에 긍정적인 언급을 하였다.

이렇게 외국자본을 끌어들이는 것은 단지 우리의 외환보유고를 늘이는데만 그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다. 외국자본의 국내 유입과 '동전의 양면 관계'에 놓여 있는 것이 바로 '노동시장의 유연성 증대'이다. 당선자 측이 노동자측을 향하여 던지는 메세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노동자 여러분 그동안 우리나라의 자본에게 얼마나 당하셨읍니까 ? 게다가 최근에는 많은 기업이 도산하거나 도산할 위기라고 내세움으로써 일자리를 잃게 되어 얼마나 괴로우셨읍니까 ? 그러나 이제 걱정이 없습니다. '정리해고제'만 도입되면 외국자본의 마구 마구 유입되어서 많은 회사가 생길 것이니 여러분은 그때가서 '외국인 회사'에서 일하시면서 더 많은 월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노동자측이 '정리해고제'를 도입하지 않으면 외국자본이 유입되지 않고 그러면 국내자본은 '노동시장의 경직성'이라는 새로운 국가장벽을 활용하여 국내에서 마음껏 활동하다가 성에 차지 않으면 그나마 모두 해외로 도망갈 것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우리 노동자들에게는 전혀 선택의 폭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2-2. 신식민지 또는 새로운 국제분업질서

아들아 내가 어렸을 적에 비누공장의 여공이었다.

우리는 열심히 일을 해서 일본 놈 좋은 일만 시켰줬다.

우리네 손으로 만든 물건이 바다 건너 일본 놈 것이었단다.

( 구전가요의 가사에서 일부 수정 )

생각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나라의 모든 회사가 '외국 회사'라고 생각해보자. 과연 득과 실은 무엇인가 ? 현재의 관행에 의하면 과실의 국가간 송금에는 세금을 물리지 않는다. 즉, 이들 회사가 우리나라에서 사업을 하여 돈을 벌면 그 돈은 전액 '본국'의 자본가에게 세금 한 푼 안내고 날아가게 된다. 물론, 그 회사에서 우리는 노동자들의 임금과 영업활동과 관련한 세금을 거둬들이긴 하지만. 과연 식민지와 다른 점은 무엇인가 ? 이런 노동을 조장하는 정부가 우리 정부라는 것, 이렇게 해서 생산된 물건을 소비할 수 있을 정도의 임금을 받는다는 것 외에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

뿔을 고치다가 소를 죽여 외세의 먹이로 내준다면, 저는 단연 뿔보다 소를 지키는 '애국'을 택하겠습니다. 외국인 투자를 끌어들여야 고용이 늘고 우리 경제가 산다는 훈시는 부분적으로 옳습니다. 그러나 기업을 내주는 외국인 투자는 임금만 얻어먹고 알맹이는 빼앗기는 장사일 뿐입니다. 제조 원가에서 임금이 차지하는 비율이 20%가 안되므로, 100원짜리 물건을 만들면 20원만 우리 몫이 되는 셈입니다. 툭하면 쳐드는 멕시코 경제의 회생이 이렇고, 개발 독재 시절의 저임금 수출이 이랬습니다. ( 정운영 1998.1.14 정운영 에세이 / 한겨레 신문 )

정운영의 주장은 부분적으로는 수긍이 간다. 하지만 그 나머지 80원을 가져가는 사람이 우리나라 자본가이든 미국의 자본가이든 그 차이가 무엇이란 말인가 ? 우리나라 자본가들이 가져간 돈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 20%를 가져간 사람들이 내놓는 금덩이의 양이 80%를 가져간 사람들보다 많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그 누구의 집에는 정말 황금송아지 한마리 밖에 없었단 말인가 ? 기업가들이 전직 대통령들에게 쥐어준 쌈짓돈이 검찰에 들킨 것만 수천억을 넘는데 집에는 현금이 없고 주식으로만 갖고 있다는 말을 믿으란 말인가 ? 우리 외환시장을 어지럽혔던 '해외 헷지 펀드'에 우리 자본가들의 뒷돈은 과연 한푼도 없었단 말인가 ? 그런 상황에서 감히 '애국'을 들먹이는 것은 옳은 논리인가 ?

어차피 이 땅에 발붙여 먹고 살아가는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어쩌면 소박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밥상의 밥을 달라는게 아니다. 그저 벗은 몸을 가리고 주리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다. 빵한조각을 얻기 위하여 배급소에서 긴긴 겨울날 줄서지 않게 해달라는 것 뿐이다. 80%를 가져가는 자들이 사회에 제대로 세금을 내서 사람들이 느끼는 상대적인 박탈감을 줄여달라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정작 논의해야할 것은 외국자본의 유입이나 노동시장의 유연성이 아니라 경제 운영의 투명성인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찌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 성경 마가복음 7:27~28 )


(주1)

'분산과 집중의 조화'가 일국의 경제원리가 아니고 '세계질서'라고 표현한 것은 개개인으로부터 세계전체에 이르기까지 먹고사는 문제로부터 문명의 향유에 이르기까지 현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부분들이 미디어의 발전을 통하여 거대한 상호 조응의 체계로 편성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이의 이해를 돕기위하여 약간의 설명을 덧붙여보자. 예전에는 세계를 얘기할 때 하나의 지구에 2백여개의 국가가 있고 그 국가안에는 다시 수십수백개의 지방이 있고 그 지방안에는 수천수만의 사람들이 살고 이런 식으로 이해하였다. 하지만 교통과 통신 미디어의 발달을 통하여 이제는 전세계의 젊은이들이 '나이키'를 신고 '맥도날드 햄버거'를 먹으며 TV를 통하여 '펩시맨'의 활약을 본다. 인터넷에 연결된 수백만의 직장인들이 매일 아침 '딜버트'와 직장의 애환을 나눈다. 한국의 노동자들이 '정리해고제'를 받아들이느냐 마느냐 하는 것 보다 인도네시아의 경제 상황이 한국의 주가를 더 심하게 흔든다. 이렇듯 우리가 만나는 모든 것은 지구의 반대편에 있는 그들의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하나의 체계속으로 통합되고 '집중'되고 있다. 이러한 전세계차원의 '집중'은 필연적으로 개별 국가의 위상을 무너뜨리게 된다. 그 전형적인 사례로 몇년전 미국이 일본에 대하여 무역불균형의 해소를 요구하며 일본제품에 대한 장벽을 높이자 오히려 이를 원자재로하는 미국에서 생산되는 제품의 가격에 상승요인을 가져오게 되어 결국은 그 조치자체를 취소한 경우가 있다. 이렇게 중간 단계의 단위들은 무너지고 이제 세계질서와 협상 테이블에 앉을 상대역은 국가가 아닌 지역사회가 되는 것이다. ( 이 부분의 설명은 약간 설득력이 떨어진다. 하지만 이 글의 목적이 '분산과 집중의 조화'에 대한 설명이 아니므로 이에 대한 더욱 정교한 설명은 별도의 글로 넘겨야 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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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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