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얘기한다 2011.07.29 13:18

(최근 휴대폰 자판의 표준화를 놓고 벌어진 논의를 보면서 생각을 정리한 글입니다.)

1. 표준은 무엇인가?

서로 다른 여러 체계가 서로 소통하기 위해서는 약속이 필요하다. 이러한 약속은 대부분 사적인 약속이다. 하지만 그 중에넌 약속에 참여하는 체계가 너무 거대해지고 그 약속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을 때의 (사회적) 비용이 너무 커져서 약속을 좀 단단하게 만들 필요가 있을 때 그러한 약속을 표준이라 한다.

2. 실질적 표준과 사실상 표준

실 질적 표준은 국가/국제 표준 기구에서 만들어서 강제하는 표준이고 사실상 표준은 널리 쓰여 따르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따르는 표준이다. 예를 들어, 전화 교환 시스템은 국제 표준이며 따라서 전세계 어느 곳에서건 같은 전화 교환기와 전화기로 서로 연결하여 통화할 수 있게 된다. 한편, MS 워드 포맷은 국가/국제 표준은 아니지만 워낙 쓰는 사람이 많아서 다른 워드 프로세서에서도 지원한다.

3. 표준과 기술 발전

표준은 기술 발전을 견인하기도 하고 저해하기도 한다. 개발하기 어렵고 돈이 많이 드는 기술이 있다고 할 때 설령 그걸 개발하더라도 널리 써먹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면 기술 개발에 투자하기 힘들다. 하지만 그것이 국제 표준 기술이라면 그것을 개발하였을 때 써먹을 수 있는 가능성이 큰 것이다. 예를 들어, 국가가 우리나라 표준 무선 통신 기술은 CDMA다 라고 못 박아버리니 아무리 돈이 많이 들더라도 CDMA 기술은 개발할 수 밖에 없고 너도 나도 개발하니 기술이 풍성해져서 발전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CDMA 정책이 옳았느냐 아니냐는 얘기는 논점을 벗어나므로 생략)

반대로 어떤 기술이 표준 기술이 되어 버리면 그 와 다른 모든 기술은 비 표준 기술이 되거 설령 더 좋은 점이 있더라도 시장에서 사장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좋은 기술을 갖고 있는 곳을 견제하기 위하여 다른 기술을 갖고 있는 쪽이 연합하여 표준을 선점해버리고 상대를 말려 죽이는 전략을 쓸 수 있다. (VHS에 밀려난 베타 기술이 이의 전형적인 사례라 할 것이다)

4. 표준의 준수 수준

대 개의 사람들은 표준의 준수가 0/1의 문제 즉, 준수하거나 준수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 표준은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인터넷 표준을 다루는 IETF의 표준 문서에서는 규정을 표현할 때 MUST, SHOULD, MAY 를 엄격히 구분하여 사용한다. MUST는 꼭 따라야 하는 규정이며 이를 따르지 않으면 표준을 따르지 않는 것으로 간주한다. SHOULD 는 따라야 하는 것이지만 따르지 않아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고 따르지 않는 것이 더 좋은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 명백한 경우 따르지 않을 수 있는 규정이다. MAY 는 따르는 것이 바람직한 규정이다. 어떤 표준을 정하거나 검토할 때 이것을 0/1의 관점으로 보지않고 다양한 준수 수준을 고려하여 보면 훨씬 유연하게 표준 문제에 접근할 수 있다.

5. 사례 분석

자판의 사례를 통하여 표준이 어떤 경우에는 필요하고 어떤 경우에는 필요하지 않은지 살펴보자.

5.1 타자기 또는 컴퓨터 자판의 경우

처 음 타자기가 만들어지던 시대로 되돌아 가보자. 두 집단이 고민에 빠졌을 것이다. 타자기 생산자들은 어떤 자판 배열로 만들어야 잘 팔릴까를 고민했을 것이다. 한편, 타이피스트를 지망하는 사람들은 어느 회사 자판을 배워두면 앞으로 일을 잘 할 수 있을까 고민했을 것이다. 해결책은? 표준 자판 배열을 만드는 것이다. 그럼 타자기 생산자들은 자판 배열에 대한 고민은 접어두고 더 성능 좋은 타자기만 만들면 되고 타이피스트들은 한번 배운 타이핑 기술을 평생 쓸 수 있으니 맘놓고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세 월이 흘러 기술도 발전하고 타자기(또는 컴퓨터 자판)의 활용에 대한 좀 더 정확한 분석이 가능해지고서야 애초의 자판이 최적의 배열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또는 물리적으로 축을 밀어서 글자를 찍어야 하던 타자기와 전기적 신호로 눌림을 감지하기만 해도 되는 시대에는 최적의 배열을 평가하는 방법도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은 시프트 키를 누르는 것이 별로 힘들지 않지만 예전의 기계식 타자기에서는 시프트 키를 누르는 것은 상당한 노동이다.) 그래서 더 좋은 자판 배열을 만들어 냈다. (예를 들어, 영문 자판의 경우 기존의 쿼티 자판 대신 드보락 자판이 등장한 것이다.)

드보락 자판이 좋다는 건 알지만 기존의 쿼티 자판에 이미 익숙한 사람들은 쉽게 옮아가지 않았다. 게다가 드보락이 보급 되던 시절의 운영체제에서는 드보락 자판을 지원하지 않아 별도의 프로그램을 설치해야 하는 불편이 있었고 (그랬던 것 같은데 확실치 않음) 대다수의 자판에는 이미 쿼티로 글자가 새겨져 있으므로 드보락 자판에 도전하는 것은 만만치 않은 과제였던 것이다. (키 캡을 옮겨 꽂을 수 있는 키보드도 있고 요즘 운영체제에서는 기본적으로 드보락 자판을 선택할 수 있지만 여전히 쿼티가 주류로 남았다.)

5.2 휴대폰 자판의 경우

휴 대폰 자판의 경우 한글 자판 표준은 그동안 없었다. (최근에 정했다고 뉴스를 본 듯) 없는 이유는 여러가지 일 것이다. 우선, 각 휴대폰 제조사가 나름의 자판 배열에 대하여 특허를 갖고 있었으므로 남의 자판 배열이 더 좋다고 해도 가져다 쓸 수 없어서 사실상의 표준도 만들어질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컴퓨터 자판과는 달리 남의 휴대폰에서 고속으로 문자를 입력해야 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어차피 나는 내 휴대폰을 거의 항상 쓰므로 거기에 익숙해지면 남들이 자기들 폰에서 어떤 자판을 쓰건 나랑 상관이 없다. (한편, 동네 피씨 방에 갔는데 당신이 모르는 배열의 자판이 놓여 있다면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을거다.) 따라서, 휴대폰에서의 자판 표준은 애초에 태어날 필요가 없고 약간의 필요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가끔은 남의 폰을 쓰거나 또는 내가 새로운 폰을 샀는데 자판 배열이 다를 수 있으므로) 그리 절실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점은 스마트 폰 시대에 와서는 좀 더 뚜렷해졌다. 즉, 자판 자체를 내려받아서 설치할 수 있으므로 시중에 있는 수많은 다양한 자판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자판을 그냥 쓰면 되는 것이지 굳이 표준을 만들고 모두가 그걸 배워야 할 필요는 없어진 셈이다.

게 다가 대다수의 스마트 폰은 터치 뿐만 아니라 끌기(드래그)를 지원하므로 이를 결합하면 아주 다양한 입력 방식이 앞으로 나올 수 있다. (스와이프 자판이나 팜 파일럿 시절부터 살아 남은 그래피티 자판이 그 사례) 또한 앞으로 멀티 모달 입력이 가능해지면 훨씬 더 다양한 글자 입력 기술이 나올 수 있다. 그런데 어설프게 지금 뭔가를 "국가 표준"으로 만들고 강제한다면 이 모든 가능성을 짓밟게 되는 것이다.(라기 보다는 표준이 있어봤자 어차피 스마트 폰 시절에는 아무도 신경도 안 쓰고 자기 편한 것을 받아서 쓸 것이라는 것이 좀 더 사실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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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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