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얘기한다 2011.10.12 17:06
-- 사랑하고 존경하는 논객 진중권의 평론 절필 선언에 부쳐 --


1. 문제 풀이 이론으로 생각해보는 실세계

곽교육감의 구속을 둘러싸고 진보 논객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패싸움이 도를 넘었다. 무척 언짢게도 이런 식의 분열상은 전혀 낯설지 않다. 문성근이 백만민란을 들고 나왔을 때도 더 거슬러가서는 민노당에서 진보신당이 갈라져 나올 때도 좀 더 가면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둘러싼 논쟁에서도 그랬다. 아마 더 거슬러 가겠지.

거 참 머리에 든게 많아서들 그런지 말도 많고 들어보면 이쪽 얘기도 맞고 저쪽 얘기도 맞다. 그래서 사지선다형 교육을 통해 정답은 하나 뿐이라고 배운 무식한 공돌이는 정신이 사납고 친한 벗들이 서로 다른 진영에 있으니 맘이 아프다.

작년에 크게 유행한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보면서 뭘 느꼈는가? 올바르다는거 그렇게 간단한게 아니다. 예컨대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달려가는 고장난 버스를 세우기 위해 육교 난간에 기댄 (척 보기에도 어차피 몇년 내로 성인병으로 죽을 것 같은) 뚱땡이를 밀어 떨어뜨려야하나 말아야 하나? 라는 식의 질문 말이다.

문제 풀이 이론을 빌려서 생각해보면, 공간에 온갖 답이 둥둥 떠 있을 때 정답과 오답을 하나의 선(또는 평면)으로 구분할 수 있을 때 선형적으로 구분된다고(linearly separable) 부르는데 이런 건 무척 쉬운 문제에 해당한다. 그래서 아주 간단한 도구를 사용해서도 쉽게 풀 수 있다. 그런데 세상사에 그런 문제는 거의 없다. 어딘가 선을 그으면 그 선 안쪽에도 오답은 있고 (즉, 내 논리에도 허점은 반드시 있다 -- 거짓 주장의 오류라고 부르자. 귀무가설을 무엇으로 잡느냐에 따라 달라지지만 대략 통계학의 2종 오류와 비슷하다) 선 너머에도 정답은 있기 (즉, 상대의 논리가 다 틀린 건 아니다 -- 거짓 무시의 오류라고 부르자. 귀무가설을 무엇으로 잡느냐에 따라 달라지지만 대략 통계학의 1종 오류와 비슷하다) 마련이다.

거짓 주장의 오류를 줄이기 위하여 정답과 오답을 구분하는 선을 자꾸 당기다 보면 내 주장의 상당 부분도 선 너머 오답의 영역으로 가게 되어 (속으로는 옳다고 생각하는) 내 생각을 부정해야 하는 자기 부정의 사태에 빠지게 된다. 지나친 독선으로 흐르다 종국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지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단순화 하자면 왕년의 PD파 들이 이런 함정에 빠지기 쉽다)

거짓 무시의 오류를 줄이기 위하여 선을 자꾸 밀다 보면 (속으로는 틀렸다고 생각하는)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어느 순간 원칙이 무너져서 "뭐 좋은게 좋은거지" "생각은 틀렸지만 도움이 되는 면이 있으니 껴안고 가자"는 식이 되어 버린다. 결국 피아 구분은 없어지고 "친하면 우리 편 안 친하면 나쁜 편" 또는 "품성이 좋으면 우리 편 포악하면 나쁜 편"으로 구분하는 유아적 세계관에 빠진다. (왕년의 주사파에 대한 내 기억은 딱 이런 사람들이다)

2. 인터넷의 성공에서 뭘 배울 것인가?

2.1 개미 허리와 미인 대회

이때까지 발명된 모든 네트워크 기술을 다 제압하고 인터넷이 당당히 최강의 전지구 네트워크가 된 것에는 아주 분명하고 과학적인 이유가 있다. 인터넷 구조에서 가장 결정적인 원리는 "모든 것은 IP를 통해서" ("Everything over IP, and IP over everything")라는 말로 요약된다. 

즉, IP계층 보다 높은 모든 계층은 통신을 위해서 IP 만을 이용하고 IP 계층은 통신을 가능하게 하는 다양한 모든 매체를 일관성 있게 지원한다. 따라서, 다양한 응용 프로토콜이 IP 계층 위에서 공존할 수 있고 다양한 매체(광 케이블, 구리 케이블, 위성 통신 등)를 뒤섞어서 쓸 수 있다. 그래서, 위와 아래로는 다양성을 인정하지만 한 가운데는 단 하나의 프로토콜만 허용하는 구조 즉, 모래시계 구조가 된다. (서양 사람들 눈에는 모래시계가 좋은 비유인지 몰라도 나는 개미 허리라고 부르는게 입에 더 착착 붙는다.)

모래시계 구조는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바와 같이 온갖 응용 서비스가 경쟁하며 생로병사의 생태계를 이어가게 만드는 원리가 된다. 새로운 응용 서비스를 인터넷에 추가할 때 그것이 IP를 사용하는 한 그 어느 누구의 승인도 받을 필요가 없이 바로 동작한다. 물론 같은 응용 프로그램을 설치한 사람들끼리만 서로 되겠지만. 그래서 비슷한 서비스가 쏟아져 나오면서 미인대회를 거쳐서 한 두 서비스가 결국 엄청난 신데렐라가 된다. 즉, 거의 완벽한 시장 경쟁을 허용하는 시스템이다.

2.2 꽃이 피게 하라

하지만 이것만으로 오늘 우리가 누리는 인터넷의 힘을 충분히 설명할 수는 없다. 위의 원리를 통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건 다양한 응용 서비스일 뿐이다. "구슬도 꿰어야 보배"라고 했듯이 이들 서비스가 따로 노는 것 보다 멋지게 결합될 수 있다면 단순히 각각의 서비스를 합친 것 보다 더 멋진 서비스로 변신할 수 있다. 이를 소프트웨어 공학을 하는 사람들은 소프트웨어 지향 구조(SOA, Software Oriented Architecture)라고 부르고 웹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매시업(mashup)이라고 부르고 사업체들은 오픈 API(application program interface)라고 부른다.

구글 맵을 이용하여 맛집 소개한 블로그 글이 트랙백이 되고 트위터로 전송되고 클릭하면 글과 연결된 지도를 열어볼 수 있는 뭐 그런 것 말이다. 요즘 어지간히 잘 나가는 서비스는 솔직히 서로 너무 나도 쉽게 넘나들 수 있다. 개별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들은 자기 서비스를 외부로 개방하여 다양한 서비스가 더 연결될 수 있게 함으로써 자기들의 힘 만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페이스북 없는 팜빌 또는 팜빌 없는 페이스북을 상상해보라. (관련하여 읽을 만한 제 글 -> 꽃이 피게 하라 - '서울버스' 앱 사태를 회고한다)

2.3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전화기를 발명한 그레이엄 벨은 전화기가 널리 보급될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벨은 아마 기존의 전보보다 좀 더 좋은 통신 수단으로 전화기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줌마들이 전화기를 통해 수다를 떨기 시작하자 전화기는 문명화된 세상의 지표가 되었다. 사람 그리고 수다 혹은 펌질이 인류 생존에 미치는 영향을 결정적이다. 날이면 날마다 빨래터에서 교환되는 수다가 아니라면 그 팍팍한 농경 사회를 우리 선조들이 버텨낼 수 있었을까?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획득한 개인은 자신이 속한 사회 집단을 향해 정보를 전송한다. 획득에 사용한 응용 서비스와 전송에 사용한 응용 서비스가 같을 필요는 없다. "내가 디씨가서 (또는 뽐뿌가서) 본 건데 말야..." 라는 트윗은 다들 익숙하지 않은가? 사회망을 통한 정보의 재전송은 상상을 초월하는 파괴력을 가지는데 그 이유는...

사회에서의 신원은 다차원적인 특성이 있다 즉, 개인은 각기 다른 사회적 맥락에 걸쳐 있으니 사회적 거리에서는 삼각부등식이 깨지는 것이다.

Social identity, therefore, exhibits a multidimensioned nature - individuals spanning different social contexts - that explains the violation of the triangular inequality in social distance.

Duncan Watts <Six Degrees: The Science of a Connected Age> pp. 151

삼각부등식이 깨지기 때문이다. 삼각부등식이란 한 변이 나머지 두 변의 길이를 합친 것 보다 더 길 수는 없다는 수학의 원리이다. 서울 - 부산의 직선 거리는 서울 - 대전의 직선 거리 더하기 대전 - 부산의 직선 거리보다 더 길 수는 없다는 당연한 얘기다. 그런데 이런 수학과는 달리 사회에서는 나하고 을순이의 사회적 거리가 나하고 갑돌이와 사회적 거리 더하기 갑돌이와 을순이의 사회적 거리보다 더 멀 수 있다. 쉽게 말해서 나하고 을순이는 쌩판 모르는 사람인데 나와 갑돌이도 친구고 갑돌이와 을순이도 친구다. 따라서, 내가 날린 트윗이 쌩판 모르는 사람에게 한두 다리 건너서 전달이 되는 것이다.

이때까지는 사회적 네트워크가 실제 사회 (우물가, 빨래터, 목욕탕, 공동화장실, 회사 사무실 등) 를 통해 매개되었지만 인터넷 위의 멋진 응용 서비스 덕분이 다양한 방법으로 사회적 네트워크를 연결하고 수다를 떨 수 있게 됨으로써 이전 시대에는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진보가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3. 그래서 어쩌라구
 
실세계에서 벌어지는 살벌한 논쟁보다 더 살벌한 것이 인터넷 생태계에서 벌어지는 사업체들 간의 응용 서비스 전쟁이다. 하지만, 인터넷의 응용 서비스는 "자기가 옳고 다른 서비스는 틀렸다"고 얘기하지 않는다. 그저 미인 컨테스트를 펼치며 공존한다. 선택은 소비자가 한다. 논쟁도 마찬가지다. 일차적으로 논쟁은 논쟁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것이지만 결국 그것이 사회적 함의를 갖는 것은 그 논쟁을 소비한 사람들의 태도에 달렸다. 상대방을 100% 설득할 수도 없고 모든 소비자를 다 내 것으로 만들 수도 없는데 상대방이 항복할 때까지 또는 모든 사람들이 다 설득될 때까지 밀어부치는 저돌성은 피곤하다.

실은 더 문제는 논쟁 소비자들이다. 인터넷에서는 세계 최고의 서비스를 자유로이 결합해서 쓸 수 있다. 구글의 안드로이드에 아마존의 킨들앱을 깔아 책을 읽고 팟스캐트 서비스를 받지 않는가? 각 서비스 제공자는 다 잘하는 분야도 있고 못하는 분야도 있다. 그냥 그 순간 가장 맘에 드는 것을 골라서 섞어서 잘 쓰면 된다. 그런 것을 한 제공자가 주는 서비스만 소비하면서 "왜 안드로이드폰에서는 팟캐스트가 안돼?"라는 식의 미련한 불평을 하면 자기만 고달프다. 마찬가지다. 어떤 논객이 어떤 이슈에서는 좋은 얘기를 했지만 딴 이슈에서는 바보가 될 수 있다. 그런 걸 가지고 엉터리 얘기까지 수용할 필요도 좋은 얘기까지 버릴 필요도 없다. 그냥 각 논객들이 가진 좋은 주장을 걸러서 들으면 그만이다. (그렇다고 듣기 좋은 소리만 들으라는 건 물론 아니다. 소비자의 올바른 잣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논쟁이 논객들의 자기만족만을 위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논쟁은 시중의 갑남 을녀를 통해서 흘러가면서 사람들을 바꾸고 사람들을 결집시킨다. 그러한 변화와 결집은 개개인의 논객이 출발점은 될 수 있어도 끌고 나갈 수는 없다. 월가를 점령하자고 나선 사람들이 지금의 상황을 예견했을까? 또는 그 사람들이 정말 정확한 노선을 제시했기 때문에 여기까지 오게되었을까? 절대 아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은 멍청해 보이지만 인류 전체로는 실로 찬란한 문명을 건설하지 않았던가? 마찬가지다. 사람을 믿어라. 그리고 그저 사람들의 수다가 흐르게 하라. 논쟁은 거들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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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