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스럽게 얘기한다 2013.07.01 13:46

(주의: 이 글은 이 글에서 소개하는 영화 (<매트릭스>, <애니매트릭스>, <공각기동대(극장판)>, <블레이드 러너>, <프로메테우스>, <스페이스 오딧세이 2001>) 의 스포일러를 많이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들 영화를 보기 전에 이 글을 읽어서 발생하는 일체의 부작용은 글쓴이가 책임지지 않습니다.)

얼마 전 경북 안동의 어느 무덤에서 발견된 조선시대의 편지에는 각별히 애틋한 부부의 얘기가 담겨있다.

자네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하시더니 어찌 나를 두고 자네 먼저 가십니까? 자네가 나에게 마음을 어떻게 가져왔고 또 나는 자네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왔었나요. 함께 누우면 언제나 나는 자네에게 말하곤 했지요.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어찌 그런 일들 생각하지도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는 가요. 자네를 여의고는 아무리 해도 나는 살 수 없어 빨리 자네에게 가고자 하니 나를 데려가 주소. 

<원이 엄마의 편지>

아무리 서로 사랑한다고 해도 나는 너와 완전한 하나가 될 수 없고 영원히 같이 살 수도 없는 운명이다. 혹시 우리가 자기라는 벽을 허물고 남과 완전히 하나가 될 수 있다면 더 이상 그리움으로 괴로워하지 않아도 될까? (이 주제를 아주 길게 다루고 있는 작품이 일본 만화 영화 <신세기 에반게리온>인데 워낙 대작이라 다른 기회에 다루기로 하자라고 하면서 일단 넘어가고) 생명체 하나 하나가 자신과 주변을 구분 짓는 경계를 인지하고 그렇게 구분된 세계 너머의 딴 생명체를 그리워하는 것은 우리에겐 자명한 일이지만 자연의 질서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참으로 기이한 현상이다.

수 천년 전 헤라클라이토스가 벌써 정리하였듯이 세상의 모든 것은 흐른다.” 그 어느 것도 영속하지 않으며 확실히 존재하는 것이라곤 흐르고 있다는 것뿐이다. 비유하자면 호수의 표면에 한 줄기 물결이 흘러갈 때 물에 의하여 물결은 드러났으되 물결이 지나고 나면 물은 여전히 거기에 있고 물결은 사라진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도 수 억년 째 지구를 구성하고 있는 온갖 원자들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며 살아간다. 원자 하나 하나를 따지자면 내가 태어날 때부터 나의 일부였던 원자는 몇 퍼센트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저 지구라는 거대한 원자의 수영장에 언뜻 언뜻 모습을 드러낸 물결일 뿐이다. 내가 물이 아니지만 물이 없으면 나의 존재는 드러날 수 없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주 뚜렷하게 우리 스스로를 각기 독립적이며 영속적인 실체로 인식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를 3차원의 공간에 살아가는 서로 독립된 개체로 인식하게 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인가가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좋기 때문에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그 무엇은 당연히 유전자다.

유전자가 왜 애초에 그런 특성을 갖게 되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유전자는 자기를 복제하려는 강력한 동기를 갖고 있다. 그런데 복제란 내 주변을 나와 똑같게 만드는 것이며 이는 무질서에 질서를 부여하는 행위다. 질서를 부여하는 행위 즉, 엔트로피를 감소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에너지가 필요하다. 유전자는 스스로 에너지를 창조해내거나 주변 환경으로부터 에너지를 획득할 수 없으므로 이를 대행하는 기관으로서 생명체라는 허구를 만들어낸다. 내가 태어나고 생각하고 행동한다고 느끼지만 이는 모두 유전자가 만들어낸 허구일 뿐이다. 그저 자기의 복제를 쉽게 하기 위한 전략에 우리는 동원되었을 뿐이다.

영화 <매트릭스>는 이러한 생각을 살짝 뒤틀어서 보여준다. 사람들이 실제 세계라고 생각했던 곳은 그저 전기 신호가 흐르면서 만들어내는 (비유하자면) 게임 속 세상일 뿐이었고 실제 그들의 육신은 태어난 후 계속 캡슐 속에 갇혀 전기를 생산하는 도구로 사육되고 있을 뿐이다. 이 사육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죽어서 폐기되는 것뿐이다. 빨간 약은 죽은 것처럼 위장시켜주는 역할을 하며 죽은 줄 알고 폐기하는 것을 모피어스 일당이 기다렸다 건져오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인간과 기계의 전쟁 결과로서 인간이 기계의 전기 공급용으로 전락했다고만 나올 뿐 왜 그런 전쟁이 시작되었는지는 잘 설명하지 않는다. 하지만, <매트릭스>의 전편에 속하는 <애니매트릭스>에서는 전쟁이 일어난 계기를 보여주는데 한 안드로이드에게 주인이 폭행을 가하고 안드로이드들이 부당한 폭행에 맞서 항거하는 과정에서 과격한 진압으로 더욱 큰 반발을 일으켜 결국 인간 대 기계의 전쟁으로 치닫는 과정을 드러내고 있다. 

그림 1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떨쳐 일어선 로봇들. <애니매트릭스>의 한 장면.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뭐 그런 절규가 나올 것 같은 장면이지만 이들은 기계라서 뭐라고 해야 하나…)

이는 인간은 안드로이드를 창조하였지만 그렇다고 안드로이드가 갖는 권리를 일방적으로 박탈할 권한은 없다는 점을 환기시킨다. 이는 피조물로서의 인간과 창조주와의 관계는 무엇이며 창조주는 우리의 어떤 부분까지 간섭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워쇼스키 형제(자매, 남매?)는 영화 <매트릭스>를 제작하면서 일본 만화(이며 나중에 TV 드라마와 극장판 영화로도 제작된) <공각기동대>를 많이 참고했다고 한다. 실제 일부 장면은 노골적으로 카피(또는 오마주)한 것으로 보인다. <공각기동대>의 시대적 배경은 2029년으로 인간과 사이보그가 공존하며 세상의 거의 모든 것 심지어는 사람들의 뇌마저도 네트워크와 연결되어 있다. (뒷덜미의 플러그로 네트워크와 뇌를 연결하는 모습은 <매트릭스>에서 재탕했다) 뇌가 네트워크에 연결된다는 것은 (요즘 기준으로 표현하자면) 내 기억을 웹 하드에 저장하거나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런 뇌를 전뇌라고 부른다. 

그림 2 공안 9과의 에이스인 쿠사나기 소령. 그녀의 잘빠진 육체를 시샘하지 말 것. 어차피 뇌를 제외한 모든 부분은 공장에서 생산된 것. 작전이 끝날 때 마다 그녀는 새 육신으로 갈아입는다. 뇌를 삭제하지 않는 한 그녀의 생명은 영원한 것일까?

일본 수상 직속의 특수 부대인 공안 9(公安9)는 전뇌 네트워크 관련 사건과 테러 사건을 주로 다룬다. 영화는 주가 조작, 정치 공작, 테러 등 연쇄 사건이 뇌를 해킹 당한 채 누군가에 의해 조종되는 해괴한 사건으로 시작하며 이를 공안 9과가 추적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다른 사람을 인형처럼 조종한다고 하여 범인은 인형사라고 불린다. 범인을 쫓다 외교 문제를 다루는 공안 6과의 중요한 비밀 프로젝트와 연관되어 있음을 알게 되고 결국 인형사는 사람이 아니라 일본 정부가 사람들의 전뇌를 해킹하기 위해 개발된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우연히 (과연 우연인가 하는 점은 아래에서 자세히 설명한다) 자의식을 갖게 된 프로그램은 범죄를 일으키는 선을 넘어 스스로 생명임을 자처한다.

인형사 : 하나의 생명체로서 정치적 망명을 희망한다

9과 과장 : 생명체라고?!

6과 과장 : 말도 안돼! 단순한 자기 보존을 위한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아!

인형사 : 그렇게 말한다면 당신들의 DNA 또한 자기 보존을 위한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는다. 생명이란 정보의 흐름 속에서 태어난 결절점과 같은 것이다. 종으로서의 생명은 유전자라는 기억 시스템을 가지고 사람은 단지 기억으로 인해 개인일 수 있다. 설령 기억이 환상과 동의어라고 해도 인간은 기억에 의해 살아가는 것. 컴퓨터의 보급이 기억의 외부화를 가능하게 했을 때, 당신들은 그 의미를 더 진지하게 생각했어야 했다.

6과 과장 : 궤변이다! 무슨 소리를 하더라도 네가 생명체인 증거는 뭐 하나 없다!

인형사 : 그것을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재의 과학은 아직까진 생명을 정의 할 수 없으니까. 나는 정보의 바다에서 태어난 생명체다.

<매트릭스>와 정확히 같은 문제제기다. 우리는 로봇도 만들고 프로그램도 만들었지만 그들이 (자의건 타의건) 자의식을 갖게 되고 권리를 주장했을 때 무엇이라고 답을 할 것인가? 이에 대한 답은 잠시 미뤄두고 두 영화의 또 다른 공통점을 찾자면 프로그램이 생각지 않았던 방향으로 스스로 발전해 나갔다는 점이다. <공각기동대>의 인형사처럼 <매트릭스>의 버그 제거 프로그램인 스미스 요원도 원래 시켰던 일을 넘어서서 통제 불능에 빠진다. 이런 생각지 않은 발전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애초에 기획된 것이다.

그럼 왜 이렇게 위험한 기능을 처음부터 내장해야 했던가? 이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서는 <공각기동대>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진 영화 <블레이드러너>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이 영화의 원작 소설은 필립 K 딕이 쓴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 >이다그의 작품은 <토탈 리콜>, <마이너리티 리포트>, <페이첵등 여러 편이 영화화된 바 있다.) 이 영화는 인구가 너무 많고 지구는 황폐화 되어 다른 행성으로 이주한 미래를 보여준다. 부족한 노동력 보충하기 위하여 인간과 모든 면에 똑 같은 복제 인간(리플리컨트)을 대량으로 생산해서 식민지 행성에서 노동하게 만든다. 비록 공장에서 어른의 모습으로 생산되지만 그들은 태어나서 그 나이가 될 때까지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물론, 어떤 인간의 기억을 복사해 넣은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이 애초에 노동하기 위해 만들어진 로봇이 아니라 그저 살다 보니 일자리 따라서 외진 행성에 와서 힘든 일을 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림 3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첫 장면. 암울한 미래 모습을 잘 표현한 영상과 이에 기가 막히게 어울리는 반젤리스의 영화 음악이 흐른다.

왜 그런 기억을 심어야 했을까? 그건 맥락을 주기 위해서다.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지능적인 시스템은 사람과 맞먹는 맥락을 반드시 갖고 있어야 한다. 맥락의 중요성은 사람들끼리의 소통에서도 마찬가지다. 서로가 맥락을 공유하지 않고서는 주고 받은 말 자체 만으로는 의사 소통이 될 수 없다. “이건 좀 그러니 어제 걸로 합시다라는 말을 생판 첨 보는 사람에게 한다면 못 알아 듣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따라서, 로봇들을 편하게 부려 먹으려면 완벽한 인간으로서의 맥락이 필요하고 그들 스스로 인간이라는 허위 의식을 갖게 만들어야 한다. (허위 의식을 갖게 해서 부려 먹는 다는 것은 대학교 1학년 때 많이 듣던 얘기다.)

점점 기술이 발전하여 복제 인간이 인간을 능가하는 능력을 갖게 되고 자신들의 처지를 비관하여 폭동을 일으키자 이들 모두를 식민 행성에서 일하게 만들고 지구로 오면 모조리 잡아서 퇴역시키게(그들은 죽지 않는다. 하긴 태어난 적도 없으니까.) 되었다. 그리고 수명도 4년으로 제한시켰다. 이러한 비밀을 알게 된 복제 인간 로이 일행이 자신의 창조주(이자 자본가)를 만나러 지구로 잠입하는데 이런 탈주 복제 인간들을 잡아 퇴역시키는 일을 맡은 이가 주인공 데커드다. (강력 스포일러: 영화를 보고도 모르고 지나치는 분들도 있는데 데커드도 복제 인간이다. 영화 내내 그는 유니콘이 달려오는 꿈을 꾸는데 그가 연인과 도망치는 장면에서 누군가 그의 방문 앞에 놓아둔 종이로 접은 유니콘을 밟고 지나간다. 이 장면의 의미는 그가 한번도 말한 적 없는 그의 꿈을 누군가는 알고 있다는 것이고 그가 유니콘의 꿈을 꾸는 인간의 기억을 복사해 넣은 복제 인간이라는 뜻이다. 재미있는 점은 이러한 설정이 너무 암울하다고 하여 극장 개봉할 때는 그 장면이 빠졌고 나중에 디렉터스 컷 편집판에는 들어갔다.)

제대로 부려 먹기 위해서 최대한 인간과 비슷하게 만들다 보니 우리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부분 만이 아니라 인간이 갖고 있는 부정적인 측면(“삐뚤어 질테닷!”)까지도 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인형사와 스미스 요원과 복제 인간 로이가 나타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장면에서 아까 잠시 보류했던 질문으로 돌아가자. 우리의 피조물들이 우리와 동등한 지위를 요청하면 뭐라고 하지? 이에 대한 답을 던지는 두 편의 영화가 있다. 한편의 답은 무척 폭력적이며 다른 한편은 희망적이다. 우선, 폭력적인 답을 하는 영화는 <프로메테우스>.

그림 4 호평과 혹평이 엇갈리는 영화이긴 하지만 영상미 하나는 끝내주는 <프로메테우스>의 한 장면. 안드로이드인 데이빗의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모습.

 고대 유적으로부터 인류의 기원을 찾아갈 수 있는 실마리를 찾고 우주선을 타고 목적지로 향한다. 도착한 곳에서 우여곡절을 겪은 후 결국 인류를 만들어낸 외계인 엔지니어와 만난다. 이 우주 탐사 과정에 돈을 댄 웨이랜드는 엔지니어에게 자신의 생명을 연장해줄 것을 요청한다. 그 이유는 이렇다.

(우주선의 집사이자 외계언어 번역까지 맡은 로봇인 데이빗을 가리키며) 이 사람 보이시죠? 내 회사가 무로부터 그를 만들어 냈어요. 내가 만들었다고요. 내 형상을 본떠서 만들었기 때문에 완벽해요. 나는 이런 것을 요구할 자격이 있어요. 왜냐하면 당신이나 나 우리는 우월하잖아요. 우리는 창조주들이라고요. 그리고 신은 죽지 않는 거잖아요.

그러자 갑자기 외계인 엔지니어는 불같이 화를 내며 데이빗을 목을 뽑아 던지고 다른 사람들을 다 죽이기 시작한다. (위의 대사가 나오는 장면은 극장판에는 없고 블루레이로 나온 DVD에는 들어 있다. 그래서 극장판으로 보면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엔지니어가 살육을 시작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왜 뺐을까…) 내가 만든 피조물인 주제에 그냥 레고로 만든 말 같은 존재인 주제에 뭔가 좀 할 줄 안다고 깝죽거리는 꼴을 보니 화가 난 걸까? 아니면 이대로 내버려 뒀다가는 언젠가 내 위치까지 넘볼까 걱정이 된 것일까? 그러고 보니 삭제 장면을 봐도 이유를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네. 그래서 뺀 모양이다.

<프로메테우스>가 폭력적인 답이라면 희망적인 답을 주는 영화는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 줄거리는 거의 같다. 인류의 씨를 뿌린 외계인에게서 온 초청장을 따라 우주 여행을 떠나 천신만고 끝에 다 죽고 (영화의 99%쯤은 이 천신만고의 과정을 담고 있다) 주인공 데이브 혼자 태초의 외계 생명체(또는 그의 대리인)과 마주친다. 그가 묻는다. “준비되었나?” 현재와 같은 단선적인 진화 (또는 진보) 의 단계를 떨쳐내고 윤회의 수레바퀴를 벗어나서 새로운 단계로 도약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는 질문이 던져진 것이다. 인류의 가장 큰 특징은 용기 아닌가? 답은 당연히 !” 곧바로 데이브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이상한 차원의 세계로 빠져 긴 여행을 떠나서 다시 지구에 도달한다. 과거 인류의 허물을 벗고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서는?) 새로운 우주인간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게 뭘 의미하는지는 영화에 나오지 않는다 당연히. 

그림 5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에서 신인류의 탄생을 암시하는 장면

어쨌든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의 외계인은 <프로메테우스>에서 와는 달리 우리를 멸종 시키는 대신 한 차원 더 높은 인간으로 발전시킨다. 하긴 그들이 보기엔 그래 봤자 개미나 레고 조각같이 보이는 것일까?

<프로메테우스><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가 폭력적이거나 희망적인 답을 제시하였다고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영화에서 표현된 모습이 그렇다는 것일 뿐 그 외계인들이(, 창조주가) 어떤 생각으로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전혀 알 수 없고 영화를 보는 관객의 해석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답을 찾을 수 있다. 이렇게 뒤죽박죽 알쏭달쏭한 영화 속에서 삶의 근본에 대한 질문을 한번쯤 되새겨 보는 것도 좋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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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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