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얘기한다 2011.12.12 15:05
시골의사 박경철 원장이 강연을 할 때면 자주 인용하는 글이 있다. 케인즈가 쓴  “우리 후손의 경제적 가능성"(Economic Possibilities for our Grandchildren)이라는 글이다. 이 글은 1930년에 씌어졌다. 1930년이라고 하면 수많은 소설, 영화의 소재가 되었던 그 악명 높은 대공황이 있었던 시기다. 미국 사람들은 전례없는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그런 시기에 케인즈는 이때까지의 상황과 지식에 견주어 볼 때 100년 이내에 4~8배 또는 그 이상의 성장을 이룰 것이라는 대담하고도 낙관적인 전망을 한다. 하지만 이는 글의 요지가 아니다. 곧바로 케인즈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이게 득이 되나? 삶의 가치에 대하여 믿기라도 한다면 어쩌면 득이 될 가능성이 열릴지도 모르겠다. (Will this be a benefit? If one believes at all in the real values of life, the prospect at least opens up the possibility of benefit.)

지금보면 어쩌면 시시해 보일 수도 있지만 실업자들이 길거리를 메우고 있던 시절에 경제성장이 이뤄진 이후에 벌어질 비참상에 대하여 예견한 그의 통찰은 놀랍다. 어쩌면 우리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나 "월가를 점령하라"는 얘기까지 터져나오는 현재의 상황을 보지 않았다면 케인즈의 통찰을 어떤 늙은이의 망상이라 느끼고 있지 않을까?

잠시 시계 바늘을 거꾸로 돌려보자. 시장을 중심으로한 교환이 일반화되기 이전의 경제에서는 분배는 무척 노골적인 문제였다. 가끔 텔레비전의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지금도 원시사회 풍속을 유지하고 있는 오지의 사람들을 보면 사냥에서 잡은 고기를 공평하게 나누는 행위가 무척 중요한 사회적 행위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분배가 늘 만족스러울 수는 없는 법. 특히 공동체가 커지면 커질 수록 불만은 커질 수 밖에 없다. 이에 분배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수단으로 계급이 사용되고 하층 계급이 분배에 갖게 될 불만을 억누르는 수단으로 지배층은 종교를 이용했다.

백성의 들끓는 거대한 욕망 그걸 만나면 공포에 질리게 된다. 왜? 그 욕망들이 모두 이루어질 수 없으니까. 왜? 그 욕망들이 모두 한꺼번에 풀어지면 세상은 지옥이 될 테니까. 그것을 제대로 만난 것은 바로 진시황. 그는 강력한 법률로 천하를 다스리려 했다. 하지만 그걸로 되지 않아. 해서 공자와 맹자가 필요한 것이고 또 주자가 나온 것이다. 그 무섭고도 거대한 백성의 욕망을 다스리기 위해. 서역 대진국이 기리사독교를 국교로 삼은 것도 삼한과 고려가 불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은 것도 모두 그 욕망 때문이었어. 불교도 유학도 서역의 기리사독교도 모두 이름만 달리 했을 뿐 욕망 통제 체계에 다름이 아니었다.
 --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 중 정기준의 대사 

하지만 꾸준한 생산성의 향상으로 우리는 배고픔에서 벗어나고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고 부자가 되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 시대로 접어들었다. 우리가 어렸을 때만 해도 돈은 있으면 좋은 것이지만 돈을 좇아 뭔가 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서 하는 일 즉, “직업"을 “호구지책"이라 부르며 자신의 일을 비하하곤했다. 돈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변한 것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은 키요사키의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가 베스트 셀러가 된 것과 모 카드회사의 광고에 김정은이 나와서 포근한 눈이 내리는 속에 서서 “부자 되세요~”라고 외친 것이다.

경제의 성장은 끝이 없고 누구나 노력하면 부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시절 심지어는 더 이상 생존을 위하여 생산성을 높일 필요가 없는 시대에 이르렀다. 이에 후쿠야마는 성급하게도 “역사의 종말"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교회에서 헌금 액수가 믿음의 척도로 일반화 된 것도 이와 궤를 같이 한다.

그...런...데... 

우리는 부자가 되었나? 꼭 부자는 아니라도 먹고 살게는 되었으니 행복해졌는가?

어제는 주말이라 짬을 내어 차를 정비하러 갔다가 중고차 매매 일을 하는 아는 동생을 만났다. 겨울은 비수기라 좀 한가하단다.

나: 그래? 그럼 봄 되서 날 풀리면 매기가 살아나는가?
아는 동생: 아무래도 그렇지요. 그래도 예전 만 못해요. 신학기가 되면 대학생들이 차를 사러 와서 경차는 시세도 50만원 쯤 오르고 차 세워 두기가 무섭게 빠졌는데 2~3년 전부터는 그게 없어졌어요.

등록금 천만원 시대. 그렇게 비싼 돈 내고 공부해봤자 졸업해서 88만원 세대가 되는 요즘 세대의 아픔이 여기서도 느껴진다. 그것 뿐인가? 전세계를 휩쓸고 간 99%의 저항은 또 어떤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케인즈의 질문으로 돌아가야 한다. 삶의 가치. 인간이 인간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역사는 종말을 맞이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장 즉, 역사 2.0이 시작된 것이다. (강증산이 얘기한 후천개벽이 이런 건가?)

역사 2.0은 그 이전과 무엇이 다를까? 인간의 본성에 대한 재발견 즉 르네상스가 일어나야 한다. 지난 시기 역사의 정점을 이룬 체계는 시장이다. 시장은 자신의 이익을 최대화 하려는 사람들의 이기심이 만나 평형을 이루는 체계다. 산업혁명 이래 우리는 세상이 영원히 진보할 것이며 개발이 곧 발전이라는 자유주의에 심취하였다. 어떤 이는 인민을 어떤 이는 민족을 또 어떤 이는 부르주아를 그 개혁의 주동세력으로 내세웠다는 점에서 사소한 차이가 있을 뿐 20세기의 중심에 있었던 사회주의, 자유주의, 보수주의는 본질적으로 같은 기제였다고 일찌기 월러스틴은 "자유주의 이후"에서 정리한 바 있다. 역사 2.0은 이러한 이전 시대가 갖고 있었던 전망 자체를 뛰어 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인간관계에 관한 담론을 중심으로 사회적 관점을 정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제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사회변혁의 문제를 장기적이고 본질적인 재편과정으로 접근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야말로 정치혁명 또는 경제혁명이나 제도혁명 같은 단기적이고 선형적인 방법론을 반성하고 불가역적 구조변혁의 과제를 진정으로 고민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 신영복 "강의" 중에서 인용

결국 케인즈와 같은 얘기다. 단지, 그냥 인간이 아니라 신영복은 인간의 "관계"에 좀 더 무게를 주고 있는 점이 다르다. 이러한 질문이 인류 역사에서 지금 처음 제기된 것은 아니다. 예수, 석가모니, 공자, 노자 또는 수많은 인류의 스승들이 준 가르침에서 시대의 한계 때문에 오해된 측면을 배제해나가다 보면 이러한 일체의 "색"의 세계가 무의미해진 시점에서 우리를 끌고 가는 방향타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한 실험적이고 선구적인 생각이 "교회나 절간이나 소규모 공동체 안에 갇혀있을 것이 아니라" 현실의 중심적인 원리로 도입되고 이것이 인류의 탄생 이래 지속되어온 무척 오랜 체제을 넘어서는 최초의 진정한 체제가 될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고 더 늦출 수도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기심과 이기심이 벌거벗고 충돌하는 사회에 백년 넘게 노출된 인류에게는 그 외의 생각을 생활의 원리로 받아들이자는 것이 무척 생소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주위을 잘 둘러보면 우리는 이미 그런 세상에 살고 있었다. 단지 눈여겨 보지 않았을 뿐.

미안하지만 여러 경제학자분들께서는 실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것 같습니다. 저는 금속 공학 박사 학위를 소지하고 있고, 고베 철강에서 지난 30년간 일한 덕에 철강 제조에 대해 제법 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 저도 회사 규모가 너무 크고 복잡하기 때문에 회사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반 정도 이해하면 다행입니다. 회계나 마케팅 분야 출신의 다른 임원들은 거의 아무것도 모른다고 해야 하겠지요. 그럼에도 이사회에서는 직원들이 올린 사업 계획을 대부분 받아들입니다. 직원들이 회사를 위해서 일한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지요. 모든 사람이 자기 이익만을 추구한다고 가정하고 직원들의 동기를 사사건건 의심하기만 한다면 회사는 마비되고 말 겁니다. 이해하지도 못하는 사업계획을 검토하려고 애만 쓰다가 말 테니까요. 고베 철강이든 정부든 간에 모든 사람이 자기 이익만을 위해 행동한다고 전제하면 대규모 관료 기구를 운영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 장하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이미 우리 사회는 사람들의 본성에 숨어있는 정직, 이타심 또는 관용 덕분에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우리는 이기심이 드러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을 뿐이다. 자기만을 생각하는 좁은 이기심을 넘어 모두의 이익을 추구하는 넓은 이기심(= 정직, 이타심, 관용)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를 믿을 수 있는 틀 그리고 그러한 상호 협력을 통해 내가 보상받을 수 있다는 희망이 필요하다.

대개의 사람들에게는 생소하겠지만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 대신 사용할 수 있는 운영체제로 리눅스라는 것이 있다. (컴퓨터는 대략 하드웨어 + 운영체제 + 앱으로 구성되며 운영체제는 하드웨어에서 앱이 돌아갈 수 있도록 기반이 되는 소프트웨어를 말한다.) 현재 시중에서 팔리는 스마트폰 중에서 애플에서 나온 아이폰을 제외한 나머지는 거의 안드로이드 폰인데 이것도 모두 리눅스를 운영체제로 사용한다. 리눅스는 놀랍게도 공짜이며 처음 만든 리누스 토르발즈와 전세계에 흩어진 수많은 자원봉사 개발자의 합작품이며 현재도 놀라운 속도로 발전을 계속하고 있다. 서로 얼굴 한번 본 적이 없는 수많은 개발자들이 돈도 받지 않고 운영체계 개발이라는 엄청난 일을 해낸 것은 프로그래머들 사이에서는 실로 놀라운 사건이었고 에릭 레이먼드는 왜 이런 일이 가능한지 분석하여 “성당과 시장”(The Cathedral and the Bazaar)이라는 에세이를 썼다. 레이먼드는 이러한 아름다운 협력이 가능한 몇 가지 원리를 그 에세이에서 제시하는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개발에 참여함으로써 자기 만족을 얻으리라는 전망에 자극 받았고, 그들이 하는 일이 계속해서 (어떤 때는 날마다) 향상되고 있다는 것이 보답이 되었다.

이타심 또는 관용은 자신의 생존에도 유리하기 때문에 유전자 깊숙히 새겨져 있는 것이지만 그러한 행동이 자신의 안전을 보장하고 보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전망을 주어지지 않는 한 발휘되기는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마침 인류는 참으로 복이 많다. 왜냐하면 인터넷이 있으니까. 컴퓨터가 있으니까. 인터넷이나 컴퓨터는 관용을 쉽게 발휘할 수 있게 사람과 사람을 매개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행동을 전 지구적으로 조직할 수 있게 하고 그 결과를 바로 확인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미디어 분야에서 가장 주목 받는 젊은 학자인 클레이 셔키(라고 쓸까 아니면 “내가 제일 좋아하는 대머리 학자 클레이 셔키”라고 쓸까 고민을 한참 했다.)는 전세계 사람들을 24시간 연결해주는 정보기술이 인지 잉여(cognitive surplus)를 낳았다고 설명한다. 예를 들어, 재미난 사진이 하나 올라오면 이를 이용한 합성 사진이 수천 수만장 쏟아지는 현상이 인지 잉여가 발휘되는 가장 간단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누리꾼은 이런 현상을 흔히 “잉여력" 또는 그냥 “잉여"라고 쓰기도 하는데 가끔은 경멸적 의미로 쓰기도 하므로 정확히 같은 의미는 아니다. "짜식 잉여력 쩐다"라고 하면 "와 대단한데"라는 의미와 "몹시 할 일이 없구나"라는 의미가 동시에 있다.)

클레이 셔키는 인지 잉여가 관용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공동의 가치(같은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서로 이득을 보는 것)는 물론이고 사회적 가치(같은 활동을 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그 외의 모든 사람에게도 이익이 되는 것)를 낳을 수 있다고 한다. 그가 예로 들었던 것은 유샤히디라는 사이트이다. 이 사이트는 케냐의 2007년 대통령 선거 후 발생한 인종간 갈등으로 수많은 폭력 사태가 벌어지자 이런 상황을 정리해서 지도에 보여주는 간단한 서비스로 두 프로그래머가 만든 것이다. 이후 이를 이용해서 멕시코에서는 부정 선거를 고발하고 워싱턴 DC에서는 제설 상황을 공유하고 아이티에서는 지진에 따른 피해를 집계하는 도구로 활용하였다. 각 지역에서 자기 지역에서 일어난 일을 그 사이트에 올리는 것은 무척 간단한 일이지만 이것을 누군가 중앙에 앉아서 사람들을 풀어서 그런 정보를 모으려면 거의 불가능할 수도 있다. 인지 잉여와 그런 잉여가 발휘될 수 있는 간단한 도구가 결합함으로써 엄청난 시너지를 내는 것이다.

위키피디아는 또 어떤가? 누가 돈을 주는 것도 아닌데 그리고 누가 앉아서 일일이 편집을 해주는 것도 아닌데 몇년 만에 “저절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보다 더 자료도 많고 더 정확한 백과 사전이 생겨나지 않았는가?

위의 사례는 누군가의 잉여력으로 많은 사람이 혜택을 보는 것이지만 스스로에게도 큰 혜택이 돌아오게 만든다면 더 좋지 않을까? 이런 아이디어를 보여주는 가장 멋진 프로젝트는 듀오링고(Duolingo)다. 카네기 멜론 대학의 연구진들이 만들어낸 이 멋진 프로젝트는 “세상에 좋은 컨텐트가 많은데 다른 언어로 다 번역하려면 돈과 시간이 너무 많이 든다"라는 문제와 “다른 언어를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아주 많다"라는 사실을 결합해서 컨텐트를 번역하는 행위를 통해 새로운 언어를 배울 수 있도록 하는 사이트를 만들었다. 이런 식이다. 영어를 배우려는 한국 사람이 많이 있다고 하자. 그리고 영어로된 위키피디아를 한국어로 번역하고 싶다고 하자. 그럼 우선 컴퓨터가 제대로 된 번역을 알고 있는 문장 하나와 모르는 문장 하나를 사용자에게 보여주고 번역을 해보라고 한다. 만약, 사용자가 컴퓨터가 답을 아는 문장을 정확하게 번역했다면 나머지 한 문장도 정확한 번역일 가능성이 많다. 그리고 이를 충분히 많은 수의 사람에게 같은 문제를 풀게 하면 정확한 번역이 무엇인지 몰랐던 문장의 번역을 (충분히 높은 확률로) 컴퓨터가 알 수 있게 된다. 그럼 문장 하나가 번역된 셈이고 컴퓨터 입장에서는 문제를 낼 때 써먹을 수 있는 “답을 아는" 문장이 늘어난 것이다. 이런 식으로 반복을 하다 보면 어느덧 엄청난 양의 문서를 번역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에 참여한 사람들은 영어를 배우는 일석이조의 결과가 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황당할 수도 있지만 사람들이 “충분히" 많고 그들을 잘 연결할 수 있는 정보 기술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사회적으로 이롭고 스스로에게 혜택이 돌아올 뿐 만 아니라 돈까지 생긴다면 어떨까?

예를 들어, 누군가 자가용 자동차의 하루를 살펴본다면 무척 심심할 것이다. 거의 항상 주차되어 있으니까. 만약 많은 사람들이 자동차를 공유한다면 자동차의 활용도를 높일 수 있다. 자동차 공유 서비스인 “집카"는 충분히 많은 (하지만 회원 수 보다는 훨씬 적은) 자동차를 도시 전역에 깔아놓고 인터넷을 통해 예약하면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차의 위치를 알려주고 차를 이용한 뒤 주차를 하면 다시 인터넷에 주차된 위치가 등록되는 식으로 상당히 편리하게 차를 빌려 탈 수 있게 하였다. 이를 통하여 이 서비스는 엄청난 수익을 올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도 자가용을 보유하는 것 보다 훨씬 싸게 먹히니 서로 이득이다. 더 중요한 점은 사람들이 차를 이용하는 행태를 돌아 보게 된다는 점이다. 그냥 차가 있으니 쓰는 것이 아니라 필요할 때 빌려서 쓰다 보니 사용을 더 계획적으로 하게 되고 걷는 비율이 늘어나는 등 생활 양태까지 바꾸고 있다.

“에어비앤비”는 집에 있는 빈 방을 활용하여 수입을 올리고 싶은 사람과 방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연결해주는 서비스다. 100개가 넘는 나라에 1만개가 넘은 방이 등록되어 있으며 많은 거래가 이뤄졌지만 도둑질은 하는 경우는 전혀 없었으며 예약 해놓고 안 온다거나 방이 깨끗하지 않은 등의 문제는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회원들 사이에 평판이 나빠지면 다음 거래에는 불리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 이런 사례는 어떤가? 좋아 보여서 샀지만 더 이상 필요 없는 물품은 다들 있기 마련이다. 그냥 버리긴 아까운데 필요로 한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고 더구나 가격을 매기기도 힘들다.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것과 바꾸면 어떨까? “스와프트리"는 이런 사람들을 위한 사이트이다. 워낙 많은 회원들이 있다보니 전혀 거래될 수 없을 것 같은 것도 결국은 짝을 찾아 거래되곤 한다.

이와 같이 서로 협력하여 소비함으로써 덜 생산하고도 원하는 것을 소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협동 소비" 트렌드를 많은 사례와 함께 상세히 소개하고 있는 책 “위 제너러이션"의 저자인 레이첼 보츠먼은 사람들이 원래 선한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실천을 마찰이 없고 재밌게(frictionless and funny)만 만들어 주면 된다고 한 바 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세상을 변혁한다는 것은 생명을 걸어야 하는 비장한 싸움이었다. 하지만 김어준이 "닥치고 정치"에서 지적하였듯이 이런 새로운 생활 양태를 정보기술과 결합하여 누구나 참여할 수 있고 재미있게 꾸민 다음 이것이 "더 쿨하고 더 편하고 더 유리한지 마케팅"해야 할 시대가 된 것이다. 뭐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목숨을 걸어야 하는 비장함까진 필요하지 않으니 다행 아닌가?

이전에 유토피아 공동체를 시작했던 사람들은 오래된 공동체를 떠나서 새로운 공동체를 시작하는게 최선이라고 주장했고 그래서 자주 실패했다.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는 건 공동 라이프스타일을 반문화가 아니라 문화의 일부로 만드는 것이다. 
-- 레이첸 보츠먼과 루 로저스 "위 제너레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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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묘군
책을 얘기한다 2011.01.27 18:15
(주: 예전에 알라딘 서재에 기록했던 내용을 옮겼습니다.)

멍청한 백인들 
마이클 무어 지음, 김현후 옮김 / 나무와숲

별로 오래 살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험한 꼴을 자주 보게 될 줄이야. 왜 이럴까? 왜 우리는 원하지도 않는 나라에 젊은이들을 보내고 그 대가로 엉뚱한 죽음을 자초하는 걸까? 역시 이건 우리의 삶을 옥죄는 모순들 때문이겠지. 초국적 자본, 분단, 미국...
 
<멍청한 백인들>을 쓴 마이클 무어는 <컬럼바인을 위한 볼링>이라는 다큐멘터리로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영화감독이다. 물론, 이번에 깐느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거머쥔 <화씨9/11>도 기다려지는 그의 작품이다.
 
이 책을 통하여 마이클 무어는 미국사회의 주류 즉, 백인들의 위선과 거짓 그리고 그를 통하여 조장되고 있는 전세계를 향한 숱한 폭력들 즉, 전쟁, 희생을 강요하는 일방적 무역 관행, 공교육의 파괴, 환경 파괴,
약소국에 대한 간섭 등을 고발한다. 물론, 작가의 관심은 미국민들을 일깨워 바보 같은 정치인들에게 더이상 표를 주지 말 것을 호소하는 것이지만 미국의 일방적 폭력에 일상적으로 시달리는 우리에게도 많은 점을 시사해준다.
 
미국이 좋은 나라라고 또는 미국이 잘 산다고 잘못 알고 계신 모든 분들께 강력히 추천한다.
 
그런데,
 
이렇게 멍청하고 무지막지한 백인놈들에게 애완견 노릇이나 하고 있는 우리는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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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묘군
책을 얘기한다 2011.01.27 18:14
(주: 예전에 알라딘 서재에 기록했던 내용을 옮겼습니다.)

전쟁중독 - 미국이 군사주의를 차버리지 못하는 진정한 이유
조엘 안드레아스 지음, 평화네트워크 엮음 / 창해

이라크 파병 철회를 위한 노력이 꾸준히 계속되는 와중에 전쟁에 대한 책을 살펴본다. 우선, "전쟁 중독"이라는 만화 책이다.
 
우선 만화책이라 읽기가 상대적으로 쉽다. 여기서 상대적으로 쉽다고 한 것은 이 책에서 한 컷 한 컷이 많은 정보와 시사점을 담고 있다보니 보통 만화책을 읽을 때 처럼 술술 넘어가지는 않는다는 의미이다.
 
미국의 수뇌부에 있는 인간들이 대대로 얼마나 전쟁에 광분해 왔는지 그리하여 얼마나 많은 무고한 목숨이 한줌밖에 안되는 자들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희생되었는지를 이 책은 잘 보여준다.
 
따로 그런 쪽으로 공부하거나 찾아보지 않은 사람들은 쉽게 알 수 없었던 근현대사의 비극을 미국의 개입이라는 측면에 서 잘 추적하고 있다. 더구나, 이 책에서 인용하고 있는 글은 작가의 말이 아니라 실제 미국 관료들 정치가들 군인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는 점에서 더욱 충격을 준다.
 
이 책을 읽고 나서도 이라크에 파병해야 한다는 사람이 있다면 나도 할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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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얘기한다 2011.01.27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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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이야기 1 - 충격과 공포
김태권 지음 / 이미지프레임(길찾기)

부시는 이라크와의 전쟁을 시작하면서 이 전쟁을 십자군 전쟁이라고 선언한 바 있다. 십자군 전쟁이라... 십자군 전쟁이 뭐지? 세계사 시간에 배우기는 배웠는데 그게 뭐였지?
 
김 태 작가의 "십자군 이야기"는 이런 질문에 답을 준다. 십자군 전쟁이 언제 어떤 상황에서 일어나서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는지 재미있는 그림과 적절한 지도까지 곁들여 가면서 설명한다.
 
하지만 이 책의 진정한 미덕은 그러한 역사적인 사실을 알기 쉽게 그리고 재미있게 전달한다는데 그치지 않는다. 작가는 끊임없이 이 전쟁을 지금 벌어지고 있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라는 맥락에서 설명한다.
 
그의 설명을 따라 가다보면, 부시가 정말로 미치광이 전쟁 중독자이거나 아니면 십자군 전쟁이 뭔지 들어본 적이 없는 바보이거나 둘 중의 하나라는 점을 (어쩌면 둘다?) 선명히 알게 된다.
 
이 작품은 시중의 서점에서 책으로 구할 수도 있고 작가의 인터넷 사이트 (http://www.kimtae.com/) 에서도 볼 수 있다. 인터넷 판에서는 다루지 않은 추가 정보도 책에는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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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묘군
책을 얘기한다 2011.01.27 18:10
(주: 예전에 알라딘 서재에 기록했던 내용을 옮겼습니다.)

세계 종교 둘러보기 
오강남 지음 / 현암사

한국의 이라크 파병, 이에 반대하는 국민 여론, 또 그에 이은 애꿎은 젊은이의 희생...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이번 전쟁의 본질이나 성격에 대한 여러 생각을 해보게 된다. (부시를 포함한) 일부 사람들은 이 전쟁을 기독교와 이슬람교 사이의 전쟁으로 본다. 최근 한 외신에서는 한국의 기독교 선교자들이 이라크에서 과도한 선교 활동을 함으로써 현지인들의 거부감을 일으킬 수 있다고 우려하는 얘기도 들려온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갈등이라... 이건 본질적인 문제일까?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코란" 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이슬람의 과격성은 어디까지 진실인가? 더 본질의 문제로 가보자면 종교간의 갈등은 피할 수 없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을 좇다보니 내가 종교에 대하여 너무 무지하다는 생각이 들어 "세계 종교 둘러보기"라는 책을 추천 받아 읽었다. 이 책은 이름 그대로 세계의 다양한 종교를 "말 달리며 산 쳐다보기" 식으로 둘러보는 것이라 각 종교의 심오한 가르침을 담는 것은 애초에 시도하지 않는다. 그 대신, 각 종교의 역사적인 배경과 기본적인 교리, 현대사에서 그 종교의 의미나 현실 그리고 다른 종교의 관계 등을 다루고 있다.
 
김영삼 정부의 세계화 선언 이후로 세계화는 우리 사회의 중요한 화두가 되었다. 물론, 세계화에 반대하는 전 지구적인 운동이 일어난 것도 현재 진행형인 세계화가 갖는 중요성을 드러내는 것인다.
 
하지만, 우리는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세계화를 얘기 하기에 앞서서 우리와 다른 문명권에 사는 사람들이 어떤 정신 세계 속에서 살아왔는지 최소한의 상식은 갖춰야 할 것 아닌가?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책은 온 세상에 흩어져 살고 있는 다종 다양한 인간들의 정신 세계의 한 부분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좋은 길잡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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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묘군
책을 얘기한다 2011.01.27 18:08
(주: 예전에 알라딘 서재에 기록했던 내용을 옮겼습니다.)

만행 1 -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
현각 지음, 김홍희 사진 / 열림원

나는 베스트셀러를 믿지 않는다. 그래서, 좋아 보이는 책이라도 베스트셀러가 되어 버리면 좀처럼 읽지 않는다. 그래서, 좋은 책이지만 나의 성은을 입지 못하는 책들이 종종 있을 터이다.
 
만행도 그런 책이었다. 엄청나게 팔렸다지만, 종교에 대한 좋은 자극을 주는 책이라지만 어쩐지 베스트셀러라는 것이 맘에 걸려서 볼 수 없었다.
 
우연한 계기로 추천을 받아 읽게된 만행의 가장 큰 장점은 간결한 문체라 할 것이다. 현각 스님의 얘기를 한국 분이 받아 적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적은 분의 글솜씨가 대단하다. 너무 깔끔한 문체라 현학적인 문체를 즐기는 사람에게는 밋밋하다는 느낌을 준다.
 
종교에 대한 깊은 성찰을 주는 책은 아니지만 진지하게 삶의 본질을 추구하는 한 스님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은 감동적이다.
 
보수 기독교인들에게는 비추
좀 더 이성적인 종교를 원하는 모든 분들에게 강추
심심풀이로 시간떼우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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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묘군
책을 얘기한다 2011.01.27 18:06
(주: 예전에 알라딘 서재에 기록했던 내용을 옮겼습니다.)

김남주 평전 
강대석 지음 / 한얼미디어

김남주 만큼 내 가슴을 뛰게 하는 작가가 아니 전사가 있었던가? 그의 삶은 너무 치열해서 그가 헤쳐나가야
했던 삶의 무게에 대하여 안타까움이나 분노보다는 어떤 다른 종류의 애잔함을 느끼게 한다.
 
김남주 평전의 1부는 그의 삶을 기준으로 2부는 그의 작품 세계를 기준으로 여러 꼭지로 나누어 살펴보고
있다. 1부에 비하여 2부는 좀 늘어진다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다.
 
가끔보이는 오타도 눈에 거슬린다. 하지만, 김남주의 삶에 대하여 그리고 그의 작품에 대하여 이 정도로 정
리한 책이 나올 수 있다는 것에 김남주를 사랑하는 팬으로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김남주라는 사람을 잘 모르시는 모든 분들께는 강추.
어떻게 살 것인가 방황하시는 분들께 강추.
유물론, 정치경제학, 김남주의 시 등에 익숙한 분들께는 비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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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묘군
책을 얘기한다 2011.01.27 18:04
(주: 예전에 알라딘 서재에 기록했던 내용을 옮겼습니다.)

예수는 없다 - 기독교 뒤집어 읽기
오강남 지음 / 현암사

내가 왜 기독교인일 수는 있어도 교회에는 나갈 수 없었고 세례도 받을 수 없었는지 설명해주는 책. 물론, 내용 때문에 한국내 기성교단의 목사 몇 분이 반박 서적을 몇 권을 출판 하게 만든 책. 폴 틸리히 / 유영모 / 노자 / 장자를 꼭 읽어야 겠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책. 중언부언이 많아서 좀 거슬리기도 하는 책. 하지만, 비교적 쉽게 쓰려한 흔적이 뚜렷한 책.

자신의 믿음이 조금도 흔들림이 없다고 자부하는 임의의 모든 종교의 신도들에게는 비추.

종교를 하나 쯤 믿는 것은 좋겠는데 어느 종교가 좋을 지 또는 기존의 종교/교단에는 믿음이 가지 않는 모든 사람에게는 강추.

기독교 교리가 어처구니 없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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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묘군
책을 얘기한다 2008.08.29 15:06

쓸데 없이 긴 들머리

 

아수라장을 야후 국어 사전에서는 전란이나 그 밖의 일로 인하여 큰 혼란 상태에 빠진 곳이라 설명하고 있다. 이 말은 아수라(Asura)에서 비롯된 것이다. 힌두교에서 아수라는 권력을 좇는 신으로 보기도 하고 가끔은 악마로도 본다. 영문판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아수라의 상대 개념은 데바(deva)이다. 아수라와 데바는 모두 카샤파(가섭, 그쪽 동네에서는 제법 흔한 이름인 모양이다. 석가모니 부처의 제자 중에도 마하가섭이라는 이름이 있고 불가에서는 석가모니 부처 이전에 가섭 부처가 있었다고 하는데 가섭 부처보다 힌두교의 가섭은 훨씬 더 근본적인 존재로서 여러 종류의 신은 물론 인간의 조상이다.)의 자손이다. 아수라나 데바는 한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동아리이다. 힌두교에서 아수라는 시대의 변천에 따라 점점 나쁜 의미를 갖게 되었다고 본다. 초기의 문서에서는 아수라가 도덕과 사회적 현상을 관장하고 (예를 들어, 아수라 중 하나인 바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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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수라의 일종인 바루나

나는 질서의 수호자이며 바가는 결혼의 후원자이다) 데바는 자연 현상을 관장한다 (예를 들어, 인드라는 날씨의 신이다). 후기의 문서에서는 데바를 신적인 존재로 그리고 아수라는 악마로 표현하고 있다.

 

아수라가 점차 악마로 이해되게 된 과정에 대하여는 인드라를 비롯한 데바의 무리가 제사의 대상으로서 우세해짐에 따라, 아수라가 악마로 취급된 것으로 추측한다. 한편, 페르시아에서는 반대로 다에바스 즉, 데바가 악마로 취급된다. 데바 중 하나인 인드라가 특별히 인기를 끈 배경에는 서방으로부터 인도로 진출하여 원주민을 정복하고 인도를 지배하게 된 아리아인의 특징과 날씨의 신인 동시에 전쟁의 신인 인드라의 이미지가 잘 어울리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있다. (출처: http://blog.empas.com/aumoky/read.html?a=5979952)

 

한편, 힌두교의 경전인 바가바드 기타에 따르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신성과 마성을 가진다. 바가바드 기타는 마성에 대하여는 매우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아수라의 특징을 자부, 거만, 자만, , 엄격, 무지라고 설명한다. (출처: 영문판 위키피디아) 그리고 이러한 해석의 연장선 상에서 아수라가 악마로 비치게 된 경위를 도덕을 관장하는 역할을 맡은 아수라가 자신의 역할에 너무 자부심을 갖고 엄격하게만 하려다 보니 조금이라도 나쁜 것을 참을 수 없고 그래서 온 세상을 아수라장을 만들어버려서 결국에는 악마의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고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본인의 본성이나 애초의 지고지선한 취지와는 무관하게 악마로 낙인 찍힌 아수라의 신세가 처량하다.

 

두 얼굴의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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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신성과 마성의 두 얼굴을 갖는다. 영화 다크 나이트에는 두 얼굴을 가진 세 사람이 나온다.

 

첫째 사람은 스스로 고통을 인내하고 희생을 감수하면서 악을 징벌함으로써 세상을 구원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열심히 동분서주 바쁜 배트맨이다. 하지만 그 목적의 추구 과정에서 개인적인 분노와 복수를 완전히 감출 수는 없고 결과적으로는 원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스스로 희생양이 되어 악마의 얼굴을 지닌 채 사라져간다. 아수라가 써야만 했던 그 누명을 똑같이 반복해서 쓰고 있는 셈이다.

 

둘째 사람은 정의를 구현하고자 하지만 개인적인 복수(vendetta, 영화 “다크 나이트”를 소개하고 있는 영문판 위키피디아에서는 이 장면의 설명에서 revenge 대신 vendetta라는 단어를 굳이 사용하고 있다. 두 단어가 뜻에서는 차이가 없지만 vendetta는 훨씬 더 앙갚음의 의미가 강하고 더 잔혹한 피의 복수를 의미한다. 기존 질서에 대한 피의 복수를 경쾌한 화면과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현란한 대사로 보여주는 영화 “브이 포 벤데타”가 떠오른다. 이 영화도 동명의 만화를 영화화 한 것이며 배트맨과 마찬가지로 DC 코믹스에서 출간된 영화이다. DC 코믹스는 영어권 최대의 만화 출판사로서 배트맨, 브이 포 벤데타는 물론이고 슈퍼맨, 원더우먼 등도 이곳에서 출판된 만화의 등장인물들이다. “브이 포 벤데타”의 원작자는 앨런 무어인데 그의 작품 중 “젠트맨 리그”도 영화화 된 바 있다. 두 작품 모두 좋다.)로 인하여 스스로 악마가 되어 버리고 그 벌로서 죽음을 맞게 되는 하비 덴트이다. 하비 덴트는 평범하고 선량한 세상 사람들을 대변한다. 굳이 성선설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누구든지 세상이 잘 굴러가고 스스로 잘 살 수 있게 되길 바란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고 하는 수 없이 나날이 세상에 굴복하고 영합하면서 마성을 갖게 된다. , 기독교인들이야 아담과 이브 때문에 우리가 원죄를 갖게 되었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로는 원죄 말고도 이 놈의 세상에 살아가다 보면 누구나 어쩔 수 없는 죄인이 된다. 괜히 아담 핑계 댈 필요 없다. 어쩌면 젊은 나이에 죽어 버린 이들을 우리가 아름답게 기억하는 것은 그들이 마성을 채 갖기 전에 죽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죽을 때까지 마성을 억제할 수 있다면 가장 아름다운 인생이리라.

 

셋째 사람은 숨어있는 진실을 드러내고자 악마로 행세하는 조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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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돈만 좇아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의 천박함과 무력으로 질서를 세워서 세상을 평화롭게 할 수 있다고 떠들어 대는 권력자들의 위선을 온몸으로 저항하여 까발린다. 그는 돈이나 질서가 아니라 한판 질펀한 놀이를 즐기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하다고 선전한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인생의 목적은 쾌락의 추구에 있는데, 그것은 자연적인 욕망의 충족이며, 명예욕(시장, 서장, 하비 덴트, 세상의 구원자 배트맨), 금전욕(돈을 긁어 모으는 건달과 재벌), 음욕의 노예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을 폈다. (출처: 엔사이버 백과사전) 그런 점에서 본다면 조커는 에피쿠로스적 쾌락주의자 또는 아나키스트이다. 하지만, 물질만능의 세상에서 이러한 선전이 쉽게 전달될 수 없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스스로 입을 찢어 얼굴을 찌그러뜨리고 슬픈 어린 날의 자화상을 회칠 뒤에 감추고 악역을 맡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며 사람들을 끊임없이 공략함으로써 숨어있는 진실을 환기시키려 한다.

 

악마 아수라는 누명인가?

 

너무나도 유명한 논어의 한 구절을 상기한다.

 

子曰 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논어/위정)

: 법으로 인도하여 형벌로 다스리면 사람들은 법에 저촉되지 않으면 어떤 짓을 하고도 부끄러운줄 모르게 되는 것이다. 덕으로 인도하고 예로써 다스린다면 염치가 있어 바르게 될 것이다.


(기존의 번역을 적당히 버무리고 내맘대로 의역함)

 

최근 들어 법을 무색하게 하는 사태가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있어 이런 구절을 들먹이는 것 자체가 민망하긴 하지만 어쨌든 법을 올바로 세우는 것이 궁극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자신이 가진 도덕적 기준을 가지고 세상 이곳 저곳에 다니며 모든 것을 그 기준에 맞춰 정리 정돈하려는 배트맨 즉 아수라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테스가 침대 크기에 맞춰 사람들을 잡아 늘이거나 다리를 잘랐던 것과 마찬가지의 오류에 빠져 결국 세상에 분란만 일으키게 된다. 아무리 동분서주 악당들을 물리쳐도 세상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악당은 세상과 분리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동전의 뒷면처럼 세상의 한 측면일 뿐이다. 선과 악 또는 처벌할 것인가 용서할 것인가 하는 판단은 객관적 본질적으로 주어져 있기 보다는 어쩌면 하비 덴트가 던졌던 그 동전에 의해 결정되는 우연적인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우연의 가장 드라마틱한 사례는 원더 우먼이다. 내가 기억하는 줄거리에 의하면 미군이었던 남자 주인공이 우연한 사고로 원더 우먼이 있는 세계로 가게 되고 그곳의 공주였던 원더 우먼과 사랑에 빠지게 되고 그 둘은 같이 미국으로 돌아와서 쏘련(sic!)의 나쁜 놈들(sic!)을 물리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즉, 원더 우먼이 미국을 돕는 것은 미국이 잘나서도 아니고 세계의 수호자여서도 아니고 그냥 자기 남친의 조국이기 때문이다. 원더 우먼에 대한 좀 더 자세한 고찰은 나의 이전 글을 참조할 것 -> http://newcat.tistory.com/57 만약 원더 우먼이 쏘련 장교를 만났더라면 지금은 세상이 팍스 소비에트가 되지 않았을까?)

 

근자에 개그맨보다 더 웃긴다는 유명 목사가 대다수의 사람들을 모욕하는(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969529) 발언을 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 목사도 개인적으로는 착한 사람이고 선량한 목회자이고 신실한 교인일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스스로 착하고 바르다는 자만심이 다른 사람을 배타하고 모욕하는 기반이 된다는 점이다. 바가바드 기타에서 설명한 아수라의 특징을 다시 한번 열거해본다.


자부, 거만, 자만, , 엄격, 무지


혹시 누군가가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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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기도

 

하느님. 제발 바라옵나니 속죄하고 바르게 살고 있다고 자처하는 자들을 우두머리의 자리에 오르지 않게 하옵시고 혹시 오르게 되었다면 이라크를 쳐라”, “이교도를 몰살하라이런 계시를 내리지 마옵소서. 아멘.


(사족: 부시 미국 대통령은 이라크를 침공하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관련 기사 -->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2543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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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묘군
책을 얘기한다 2008.05.14 13:29
광우병을 둘러싼 얘기가 전국을 강타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괴담이라고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젊은 과학자들이 진지한 논의를 이어가고 있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검증되지 않은 (실은 검증할 수 없는) 얘기들이 유통되고 있다. 물론 분명한 것은 우리 정부가 굴욕적인 외교를 했다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 엉터리 오역이 개입했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무리한 쇠고기 협상의 근저에는 경제 성장 외에는 보여줄 것이 없는 현 정권의 조급함이 깔려있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광우병의 과학적 실체를 꼼꼼하게 추적한 과학 에세이 "죽음의 향연"을 다시 한번 읽는 것은 실체적 진실에 한발짝 다가서는 (또는 이 한바탕의 소동에서 한발짝 거리를 두는) 좋은 방법이 될 듯하다.

"죽음의 향연"은 결코 간단한 책이 아니다. 책의 저자는 쿠루병, 크로이츠펠트 야콥병, 스크래피 등 일견 상관이 없어 보이는 산발적인 현상들이 과학자들의 치열한 탐구 끝에 하나의 거대한 악몽으로 연결되고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과학적, 정치적, 경제적 사건들을 흥미롭게 펼쳐나간다. 사뭇 음산한 느낌의 식인 풍습 장면으로 시작하는 책은 흡사 흥미진진한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게다가 모두들 변형 프리온 이론을 광우병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는 현실에서 (그리고 그 이론에 따른 연구가 두 차례의 노벨상 수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정반대편에 서있는 이론 (즉, 프리온 단백질 자체가 아니라 미세한 바이러스 또는 그 변형된 형태가 광우병의 원인이라는 이론) 도 과학적 논거에 따라 공평하게 서술하였을 뿐만 아니라 후자의 이론이 점점 더 설득력을 갖게 되어감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저작이 이를 충분히 균형있게 반영하고 있지 못함을 후기를 통하여 고백하는 저자의 자세는 진정한 과학자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너무 많은 얘기가 책에서 나오므로 여기서 그것을 요약하고 소개하는 것은 생략하기로 하고 (인터넷을 뒤져보면 나보다 천배쯤 훌륭한 사람들이 이미 잘 정리 요약한 글들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몇몇 구절을 인용하여 오늘 현재 우리에게 이 책이 주는 교훈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질병을 예방하기 위해 반드시 그 질병의 정체를 알 필요는 없다. 원인을 찾기 전이라도 개선된 위생이나 약물을 통해 어느 정도는 통제할 수 있는 질병이 많다. 그러나 전염성 해면상 뇌증은 예외적이라 할 만큼 난감한 상대였다.
203-204쪽

이 구절은 이중적인 함의를 갖는다. 첫째로는 광우병 등의 이 질병이 무척이나 다루기 어려운 질병이라는 과학적 역학적 어려움을 의미한다. 삶아도 약품 처리를 해도 자외선을 쬐어도 원심분리기로 부숴도 없어지지 않는 이 병의 근원 물질은 사실 우회적인 예방책을 세우기 곤란하게 한다. 하지만 또 다른 함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원인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현재까지 알려지 과학적 지식을 이용한 예방적 조치 (예컨대, 특정 위험 물질의 식용 금지, 동물성 사료의 사용 금지 등) 는 유용하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정부가 대부분의 통제장치를 풀어버린 금번의 쇠고기 협상은 참으로 아쉽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소 해면상 뇌증에 감염된 동물의 고기는 특정 위험 부위의 유통을 금지한다고 해도 안전하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감염성이 있다고 알려진 림프관과 신경은 둘 다 근육 속에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249-250쪽

특정 위험 물질만 제거하기만 하면 될 것이라는 생각은 어쩌면 안이한 생각일 수도 있다. 게다가 도축전에 (또는 동물성 사료로 쓰기 전에) 전수 검사를 통하여 광우병 여부를 확인하는 경우(일본이 이런 방식을 취하고 있다) 가 아니라면 광우병에 걸린 소가 도축되고 그 살코기 속에도 위험한 물질이 들어 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가축 관리국장에게 '독이 든 식품'으로 판명된 제품을 수출하는 것은 부도덕한 일이라고 끈질기게 말했다. " 영국 정부 소속의 한 수의사가 고백했다. "그러나 주제넘게 나서지 말라는 핀잔을 들었다. 수입하는 국가에서 알아서 할 일이라면서 말이다."
288-289쪽

그렇다. 모든 교역된 상품에 있어서 안전성을 책임지는 것은 결국 수입하는 측의 정부다. 예를 들어, 주어진 예산으로 상품의 안전성을 검사해야 하는 정부 당국의 경우 그 예산을 내수쪽에 배분할 것인가 아니면 수출쪽에 배분할 것인가? 당연히 내수다. 정부는 납세자를 위해 일하는 것이지 남의 나라 백성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 정부 관계자는 "미국을 믿자"고만 한다. 이건 미국을 믿고 안믿고의 문제가 아니라 교역에 있어 우리 정부의 역할이 무엇이냐에 대한 존재론적인 질문이다. 이런 식으로 방임할 것이라면 아예 협상을 할 필요도 없다. 그냥 수입업자들이 알아서 하면 될 일이다.

4월에 스위스 정부는 취리히에 있는 두 병원이 (아마도 낙태 과정에서 나온) 인간의 태반을 폐가축 처리장에다 폐기해 왔음을 확인했다. 그곳에서 인간의 태반은 가축 부산물과 섞여서, 궁극적으로 스위스의 돼지와 닭에게 공급되는 육골분 사료로 만들어졌다.
291쪽

물론, 그런 사료로 키운 돼지와 닭을 다시 사람이 먹는다. 이 책의 서두에서 소개하는 쿠루 병은 사람이 자신의 친족의 사체를 먹음으로써 전염되는 병이다. 식인 습관은 문명 사회에서는 오래전에 없어졌다. 그런데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우회적인 형태의 식인 습관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 뿐만 아니라 소나 돼지도 친족을 먹고 있다. 그 이유는 육골분 사료가 더 싸고 (어차피 버려야할 폐기물로 만드는 것인데다가 폐기물 처리 비용도 절감되므로) 성장 속도도 빠르고 맛도 더 좋아지기 때문이다. 즉, 현대의 공장화된 목축업이 이 우회적 식인 문화를 만들어내고 있는 셈이다.

돼지에게서 질병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돼지를 7~8년씩 살려 두지 않기 때문이다. 돼지는 기껏해야 생후 2~3년이면 도살되지. 우리가 실험실에서 돼지에게 스크래피 인자를 주입하고 8년동안 키웠을 때 녀석들은 스크래피 증세를 나타냈었네. 어쩌면 영구에 있는 돼지는 전부 다 감염이 되었을지도 몰라.
297쪽

40년 넘게 쿠루, 스크래피, 광우병 연구에 매달렸고 그 연구로 노벨상까진 받은 가이두섹의 지적이다. 어쩌면 이 불행한 비극은 우리가 너무 오래 산다는 것과 관련이 되어 있다. 우리 수명이 서른 살이 넘지 않는다면 이런 비극은 그냥 잠재되어 있으나 영향을 줄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다. 하나 우리는 발병이 될 만큼 오래산다. 그의 지적은 계속된다.

문제는 돼지고기만이 아니라네. 돼지가죽 지갑도 문제고 수술용 봉합사도 문제야. 수술용 봉합사는 돼지의 조직을 가지고 만들거든. 모든 닭에게도 육골분 사료를 먹였으니 ... 닭똥은 비료를 만드는 데 사용된다네. 우지 속에도, 버터 속에도 있을 수가 있어. ... 크로이츠펠드야코프병에 걸린 사람들 중에서 헌혈을 한 사람들도 있었네. 이런 식으로 혈액 유통망 속에 병원체가 돌아다닌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네.
297쪽

소나 돼지로 만드는 여러 제품들 (특히, 젤라틴 류의 제품들) 을 통하여 감염될 수 있으므로 광우병의 문제가 단순히 고기를 먹고 안먹고의 문제가 아니라고 하는 주장에 대하여 흔히들 광우병 괴담이라고 폄하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걸 평생 연구한 노벨상 수상자의 생각은 다르다는 점을 들려주고 싶다.

사람의 경우 38퍼센트는 MM 유전자형, 51퍼센트는 MV 유전자형, 11퍼센트는 VV 유전자형이다. 지금까지 확인된 변형 크로이츠펠트야코프병 환자는 모두 MM 유전자형이었다. 그러나, ... 인간 유전자형 3가지 모두를 감염시킬 수 있는 것이 분명했다.
336쪽

우리나라 사람들은 MM 유전자형이 많다는 것이 소위 광우병 괴담에 포함되어 있다. 심지어는 75% 정도가 MM 형이라는 것을 밝힌 연구자 스스로가 광우병 위험에 한국인이 더 취약하다고 할 수 없다는 식의 해명까지 하는 소동을 빚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의 유전자형 분포가 무엇이건 같에 지금까지의 연구로부터분명한 것은 유전자형과 상관없이 발병할 수 있다는 점이며 따라서, 75%가 맞네 안맞네 하는 토론은 무의미한 것일 수 있다.

"이처럼 설명되지 않은 의문들은 아직 바견되지 않은 바이러스가 전염성 해면상 뇌증의 진짜 병원체로 드러날 가능성을 여전히 열어놓는다. ... 이 질병의 원인이 되는 감염 인자의 정확한 본질을 밝혀내고, 예방약이나 치료약을 개발해 낼 미래의 연구를 질식시키는 것은 비극이 될 수도 있다."
342쪽

앞에서도 잠깐 언급하였듯이 광우병을 일으키는 인자에 대하여는 변형된 프리온 (즉, 핵산을 가지지 않는 단백질 그 자체) 라는 이론과 바이러스 또는 그 변종 (즉, 핵산) 이라는 이론 이 두가지가 있으며 전자의 이론이 두번의 노벨상을 수상함으로써 현재 많은 연구비가 그쪽으로만 투입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연구비 편식 현상은 혹시 그 원인이 프리온이 아니라면 이 질병의 극복만 미루게 될 수 있다.

이전의 황우석 교수 사태에서도 겪었듯이 연구비를 지원하는 쪽에서는 확실한 몇 곳에만 집중 투자해서 높은 수익률(ㅠ.ㅠ)을 기대하지만 과학의 발전은 그런 것이 아니라 서로 상충하는 듯 보이는 여러 패러다임이 경쟁, 교차, 상호 침투하면서 발전해왔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며 따라서, 이 문제에 있어서도 균형잡힌 연구가 지속될 필요가 있지만 전세계 어느 곳에서건 이런 식의 편식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을 새삼 발견하게 되는 것은 인류의 미래에 먹구름을 드리우는 일이라 생각된다.

요약 -- 광우병 괴담이라고 불린 것 중 상당수는 전문 연구자들의 견해와 일치하는 정설이다. 단, 이 병을 완전 정복한 것이 아니므로 100%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어느 쪽도 없고 따라서 조심하는 수 밖에 없다. 미국과의 쇠고기 협상의 현재 내용은 따라서 실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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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묘군
책을 얘기한다 2008.01.07 17:34
(1) 역사는 힘있는 자가 쓰는가 - 난징의 강간, 그 진실의 기록

원제 The Rape of Nanking: The Forgotten Holocaust of World War II (1997)

최근에 역사 책을 읽으면서 도쿄대공습이나 난징대학살과 같은 끔찍한 잔학상에 관심을 두고 있던 중 우연히 읽게 된 책.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던 학살과 강간의 진상이 너무나도 또렸하게 드러나 읽는 내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점심먹고 읽기 시작해서 다 읽을 때까지 꼼짝도 못했다. 그리고 속이 느글거려서 죽는 줄 알았다.

(2) 80일간의 세계일주 / 쥘 베른

어렸을 때 허접판으로 읽은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아닌가...) 다시 완역판을 읽었다. 애초에 어린이용으로 씌어진 책이기 때문에 뭐 엄청난 감동을 주지는 않지만 중간 중간 나오는 위트있는 문장이나 전세계를 숨쉴틈 없이 종단하는 얘기의 속도감이 대단하다. 언젠가 그 길을 따라 세계 일주를 해보리라... 막연한 상상을 했다.

(3) 교양 있는 우리 아이를 위한 세계역사 이야기 1 - 고대편

원제 The Story of the World

홈 스쿨링을 위해 쓴 책이라 아이들 눈 높이 맞춰 역사를 얘기하듯 들려주는 역사책이다. 어린이용 책이라 읽기 쉽다는게 제일 큰 장점. 공부가 아니라 재미삼아 역사를 읽는 즐거움이 쏠쏠. 하지만 내용이 어린이 수준이라는 점과 유대인의 역사를 필요이상으로 상세히 그리고 성경의 내용이 모두 사실인양 기록한 것은 거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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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묘군
책을 얘기한다 2007.02.04 13:16

장면#1

그게 언제였는 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언젠가 대학입시에서 동점자가 나오면 주요한 과목에서 고득점을 하는 순서로 뽑는데 국민윤리가 국어보다 우선 순위가 높다는 얘기를 들었다.

장면#2

고등학교 수업시간에 배운 국민윤리는 확실히 짬뽕 과목이었다. 동서양의 철학부터 반공 교육까지 도무지 한 우산아래 도저히 놓일 수 없는 주제를 한 과목에서 가르친다. 도대체 전공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는 선생님은 그 어느 주제도 제대로 소화화지 못하신다.

장면#3

국민윤리 교과에서 배운 동서양 철학에 대한 나의 단상. 동양 철학은 무슨 얘긴지 모르겠다. 알 수 없는 개념의 나열이다. 아마 뭔가 심오한게 있는데 한자라는 장벽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는게 아닌가 싶다. 서양 철학은 철학자들의 이름과 주된 주장이 나오는데 그 주된 주장이라는 너무 얇팍해서

뭐 저 딴 걸 학문이랍시고 하고 자빠졌냐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게 철학이라면 나도 철학자 하겠다 하는 생각이 든다.

장면#4

대학 가면 철학 같은 걸 제대로 배우게 될 까? 하지만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과 이를 이론적으로뒷받침해야 한다는 이념의 과잉으로 철학을 차근히 배울 기회가 없었다. 헤겔도 읽기 전에 맑스를 읽고 맑스 초급도 모르고 레닌을 배운다. 프루동, 트로츠키를 대충 귀동냥으로 듣는 동안 학창 시절은 끝나고 사회주의 블럭도 끝을 낸다. 그 뒤의 혼란을 설명하기 위한 새로운 철학의 백가쟁명이야 일러 무삼하리요. 마음을 다잡아 보기 위해 송두율을 읽지만 기초부족을 심각하게 느낀다. 그러고도 거의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갔다.

무릇 서평이란 무엇이더뇨?

나는 서평을 꼼꼼이 읽지 않는다. 왜냐하면 서평이 책의 내용을 너무 완벽히 담아낸다면 결국 그 책을 읽는 재미를 갉아먹는 스포일러가 될 것이요 만약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다면 책에 대한 쓰잘데기 없는 선입견을 갖게 될 터이니 서평이 무슨 소용이랴 싶다. 하지만 대단한 독서광인 장정일의 서평은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다. 특히 그의 어눌한 말투와 내가 늘 고대하는 헤어스타일 때문에 더욱 유혹은 강하다.

장정일이 "도덕교육과 파시즘"이라는 책의 서평을 썼을 때 나는 이미 그 책에 대하여 여러 경로를 통하여 소개를 받은 상태였고 따라서 그가 서평을 썼다는 사실만 기억하고 절대로 거의 서평은 읽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책을 샀다. 그리고 거의 다 읽어가는 지금 역시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장정일도 그의 서평에서 아마 이 책을 칭찬했을까? 다음에 확인해 볼 작정이다.

철학에 대하여

철학이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철학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는 필로소피인데 학문이라는 뜻의 소피와 좋아 한다는 필이 결합하여 학문을 사랑한다는 뜻이라는 것. 또는 사람들의 태도를 비아냥 거릴 때 "개똥철학"이라고 부른다는 것. 또는 학문 중의 학문이라고 불리는 철학. 뭐 이런 정도가 아닐까? 정작 나는 철학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다.

존재론과 인식론이 철학의 근본적인 주제라는 것은 철학의 기초를 배워서 알게 된 것이라 아니라 주체사상에 대하 소개 글에서 주체 사항이 철학을 근본 문제를 존재론과 인식론을 넘어서서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렸다는 주장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그리고 아주 "막연하게" 알고 있었다. 뭐 철학에 대하여 별도로 공부한 사람들이 아니라면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 분들에게 이 책은 좋은 철학의 입문서가 된다. 뭐? 단지 철학에 대한 입문을 위해서 이 책을 봐야 된다고? 그럼 그 많은 철학 개론서들은 다 어쩌라고? 맞다. 철학에 대한 입문서를 위한다면 그런 책들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철학에 대한 입문을 무척 간단하게 정리하고 있어 어차피 깊이 진도를 나가려는게 아니라면 쓸만하다. 게다가 철학 입문 뿐만 아니라 도덕 교육에 대한 좋은 얘기도 볼 수 있으니 동가홍상 아닌가? (물론, 철학에 대한 최고의 베스트 셀러인 "철학 에세이"나 송두율의 철학 입문서를 같이 봐 주면 더 좋겠다.)

도덕에 대하여

내가 딴 나라에 안 살아봐서 잘 모르겠는데 우리나라만큼 도덕에 대하여 많이 얘기하는 나라가 있을까? 학교에서도 도덕을 독립된 교과목으로 가르치고 유교의 발상지인 중국보다도 더 유교적 도덕 전통이 강하고 (아 참... 동성동본 금혼제도는 이제 폐지되었나? 아직인가?) 집안에서는 가정도덕을 밖에서는 교통도덕을 설법하는 나라가 우리나라다.

하지만 신문을 펼쳐보라. 아니면 밤늦게 유흥가를 가보라. 그것마저 귀찮으면 아침에 자가용 창문에 가지런히 꽂힌 야릇한 판촉물들을 보라. 우리나라 처럼 도덕이 비참하게 땅에 떨어진 나라가 있을까? (뭐 우리랑 풍습이 다르긴 하지만 성도덕과 성산업에 관한 한 일본도 "어떤 면에서는" 우리에 뒤지지 않는다). 입으로는 모두가 도덕을 외치지만 손발로는 아무도 도덕을 행하지 않는 나라. 어디가 잘못된 것일까?

일본에 출장을 가본 일이 있는가? 일본 만화나 게임 -- 그것도 야한 것들 -- 에 익숙한 남자들은 일본에 처음 출장갈 때 혹시 길에서 만난 세라복 입은 여학생이 원조 교제라도 하자고 달려 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전혀 불필요한" 걱정을 하기도 한다. 실제 일본에서 만나는 일반인들의 삶은 너무 건조해서 기름칠이라고 해주고 싶을 지경이다. 절제된 삶, 절대로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태도, 소박한 풍속이 출장간 내 눈이 비친 일본의 모습이다. (물론, 공중전화 부스마다 깔린 테레쿠라 찌라시는 예외로 하자.) 이렇게 절제된 일본 사회에서 어떻게 그렇게 황당무계하게 야한 문화가 생산되는가?

(잠시 출장 기간동안에 본)일본과 우리나라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철저하게 욕망이 통제된 사회라는 점이다. 하지만 인간의 욕망이라는 것은 통제된다고 제거되지 않는다. 통제된 욕망은 분출구를 찾을 수 밖에 없고 그 분출은 통제의 강도가 강할 수록 변태적이 된다. 고속도로에서 운전을 해보라. 과속 카메라가 있는 곳에서는 차들이 지나치게 느리게 간다. 대개 90킬로 전후. 카메라만 없으면 120, 130은 기본이다. 카메라를 더 촘촘히 설치하면 어떻게 될까? 아마 카메라가 없는 구간에서는 만회하기 위해서 140, 150으로 달리게 될 것이다. 통제가 강해질 수록 욕망의 분출은 강해진다.

하지만, 욕망이 없는 인간은 한낱 허깨비요 통제가 없는 인간은 망나니에 지나지 않을터. 그렇다면 묘수는 무엇인가? 어떻게 통제와 욕망이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말인가? 문제는 통제의 주체에 있다. 그것이 스스로의 판단에 의한 통제일 때 즉 자신의 욕망을 그 지평 너머로 확대함으로써 우리 전체 온 생명의 욕망을 관철시키는 차원으로 사고함으로써 개인의 욕망을 저절로 통제할 수 있도록 되었을 때 우리는 그 조화를 얻게 되는 것이다.

대충 감이 오는가? 이러한 얘기를 진짜 고수의 입을 통하여 제대로 설명을 듣고 싶은가? 그럼 책 사서 봐라. (참고로 이 서평은 책의 내용을 거의 인용하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요약도 아니다. 그러니까 책을 통해 내가 얻은 인상을 나의 극히 개인적인 상념의 공간에서 재해석한 것이다. 따라서, 이 내용이 맘에 안든다고 책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지 말기 바란다. 그건 순전히 나의 잘못일 뿐이니깐 말이다.)

글 읽는 재미에 대하여

세상에는 많은 종류의 글이 있다. 어떤 글을 길고 어떤 글은 짧다. 어떤 글은 몰캉하고 어떤 글을 서걱서걱하다. 어떤 글은 말초적이고 어떤 글은 심연의 깊은 곳에 침투한다.

말초적이고 짧은 호흡의 글이 만연하는 현 시대에 이 책을 읽는 것은 흡사 해외 전지훈련과도 같다. 좀 어색하고 익숙지 않지만 다양한 호흡의 책을 읽는 것은 언제나 그렇듯이 균형된 시각을 위해 좋은 일이다. 이 책에 실린 글은 정운영의 글 처럼 화려하지도 않고 도정일의 글 처럼 현학적이지 않고 에코의 글 처럼 말을 향연을 펼쳐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최인훈의 <화두> 처럼 시종일관 묵직하면서든 한 문장 한 문장은 오히려 경쾌하게 독자의 무지를 공격한다. 조 프레이저급의 흐름에 알리같은 공격이라고나 할까.

글을 닫으며

그렇다. 이 책 솔직히 재미없을 수 있다. (내가 취향이 특이한 지 몰라도 책이나 영화 추천했다가 욕을 곧잘 먹는다.) 하지만 좋은 책이다. 나의 서평이 의심스러운가? 그럼 장정일의 서평을 찾아서 확인해보라. 틀림없이 장정일 특유의 미사여구로 칭찬을 했을 책이다. (아님 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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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묘군
책을 얘기한다 2007.02.01 12:53
/* (저자 주) 몇년 전에 개인 홈 페이지에 썼던 글을 다시 블로그로 옮깁니다 */

정치적 허무주의를 조장하는 언론에 대한 도발적 문제제기

서시

      강한 자에겐 무릎 굽히고
      약한 자에겐 고개를 세우고
      그걸 공정하다고 하지
      어제는 악인을 만들고
      오늘은 영웅이라하고
      아무런 생각도 없이
      잘도 얘기를 하지
      모든 것을 비판해버리곤
      그걸 자유라 부르지
      녹슬어진 펜을 놓고서
      이젠 모든 말에 책임을 져
      방향잃고 헤매는 가엾은 무관의 제왕
      약속을 어긴 무책임뒤엔 차가운 비웃음 뿐

      - 015B [第四府]

기사 한편

그러나 그의 국가관과 불굴의 의지, 비리를 보고선 참지 못하는 불같은 성품과 책임감, 그러면서도 아랫사 람에겐 한없이 자상한 오늘의 '지도자적 자질'은 수도생활보다도 엄격하고 규칙적인 육군사관학교 4년 생활에서 갈고 닦아 더욱 살찌운 것인 듯하다. … 그는 모든 사람의 판단 기준을 이처럼 정의의 대국에 놓을 뿐 세세한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는다. … 이처럼 밑을 거쳐간 부하장교는 그의 통솔 방법을 3분의 1만 흉내내면 모범적 지휘관이란 평을 얻을 수 있다는 게 군내의 통설로 되어 있다.

( 1980년 8월 23일자 조선일보 3면 톱기사 )

강준만 - 람보

강준만 교수가 내놓은 다소 과격한 제목의 [김대중 죽이기]라는 책은 '김대중 죽이기'라는 현대 한국 정치 사의 줄기찬 흐름에 주역으로 등장한 언론과 지식인에 대하여 비판의 포화를 퍼붓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언론과 지식인 의 주장에 동감하며 정치적 혐오증을 방패로 삼고 있는 많은 시민들에 대하여도 마찬가지로 총알을 퍼붓는다. 그의 글을 매우 거 칠다. 비록 여러권의 책을 이미 출판한 바 있지만 전문 글쟁이가 아니니 거친 것은 참아야 한다. 참고 볼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 이다. 그리고 람보가 거칠지 않으면 람보인가.

이런 시원스런 글을 대할때마다 생각나는 것은 김지하의 [오적]이나 박노해의 [시사시]와 같은 문학성과 비판성을 겸비한 작가 나 글이 요즘에는 왜 없나 하고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얼음물 속에 있는 것이 오히려 따뜻하게 느껴질 정도로 차가운 바람이 쌩 쌩 불던 겨울공화국의 한가운데에 지펴진 [오적]의 장작불을 기억하는가 ?

언론이 왜 문제인가 ?

저자는 언론이 '김대중을 먹고 자라났다'고 주장한다. 어떤 경우에는 수퍼연예인으로 만들었다가 다시 혐 오의 대상으로 만들어서 독자들의 눈을 계속 자극하는 것이다. 김대중이 정계를 떠나겠다고 선언했을때 언론이 쏟아낸 그에 대한 찬사는 민망할 정도였다. 그 신문들이 불과 조금전까지만 해도 '대통령병 환자'라고 하며 김대중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우스워 죽을 지경이다. 정치가 국민들에게 혐오의 대상이 된 것에 신문의 책임이 크다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 독자들이 보기에 재미있어 하겠다 싶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보도한다. 그것도 사실만 보도하는 게 아니라 아예 소설을 쓴 다. 그래서 악순환이 빚어지는 것이다. 정치인들은 언론이 크게 보도해 줄 것이라고 생각되는 정치적 행동을 골라서 하게 된다. 그런데 언론 보도를 염두에 둔 그런 정치적 행동이 바람직할 리 만무다. 언론은 스스로 그렇게 판을 벌여놓고 나서는 정치가 형 편없다고 개탄을 한다. 이만저만한 적반하장이 아니다.
    국민들이 정치를 혐오한다고 해서 정치기사마저 외면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정치를 혐오하기 위해서라도 정치기사를 열심히 읽는다. 따라서 평소의 정치보도는 결코 선거와 무관하지 않다.
언론이 가지고 있는 기회주의에 대한 비판은 한결 신랄하다. 언론재벌 - 재벌언론간에 벌어진 싸움에서도 드러났듯이 언론사들 은 우리 사회의 어느 집단보다 이기적인 성향이 강하고 그들의 힘도 [제4부]라는 애칭에 걸맞게 강하다. 그런데 이때까지 정부권 력은 언론사를 '채찍'과 '당근'으로 통제해왔다. 올해 초에 {서울신문}에 대한 세무조사로 항복을 받아내면서 모든 신문사에게 강한 경고를 던진 사례는 김영삼 정부의 언론통제 방식을 잘 드러내었다. 이런 관행은 물론 훨씬 이전 일제시대로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언론사는 기득권 세력과 정신적, 물질적으로 탄탄한 연대를 구축하면서 극우보수주의를 찬양하는 동시에 돈이 되는 기사를 만들어내는데 열중하고 있다.
    대중의 공포감과 이기심을 자극하는 '극우'는 중도적 입장이나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적 입장마저도 붉은 색으로 슬쩍 덧칠시켜 시장에서 내쫓아버리는 신통력을 발휘한다. 지금 {조선일보}가 하는 짓이 바로 그것이다. 이건희 회장의 특명을 받고 '신문혁명' 을 선언하념서 {조선일보}를 따라잡겠다고 나선 {중앙일보}가 {조선일보}를 흉내냈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들 자신 과 그들이 지지하는 수구기득권 세력의 입지를 강화하면서 돈도 버니 그야말로 도랑치고 가재잡는 격 아닌가.
지식인은 왜 문제인가 ?

저자의 지식인 비판은 한결 통렬하다. 그의 지식인에 대한 비판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첫번째 로 기존의 정치평론들이 정치에 대한 무관심 또는 혐오를 부추키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파괴'라는 손쉬운 정치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 자기의 무소신이나 무책임을 손쉽게 벗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두번째로는 진보적인 지식인들 마저도 손쉬운 양비론이나 지나친 현실론을 얽매여 사물을 객관적으로 보려는 노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진보를 자처하는 지식인 중에서도 호남차별의 이데올로기에 젖어있는 사람들도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 진보지식인의 편견이 언론의 문제보다 더 심각한 것은 그런 지식인의 사고방식이 진보운동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기 때문이다.

세번째 비판은 지식인들이 '낭만적 지도자론'에 빠져있다는 것이다. 많은 지식인들이 현실 정치의 역학관계를 무시하고 인물과 민중이라는 막연한 도식을 상정하고 지도자와 민중과의 올바른 관계를 포착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김대중같은 지 도자는 현실 정치에 뛰어드는 것보다는 차라리 2선에 앉아서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평화'와 같은 고상한 얘기나 해야 하는 걸로 만들고 있다. 즉, 어떤 개인을 그의 실제 모습과는 무관한 상징적인 위인으로 간주하다가 그가 정치판에 뛰어들려고 하면 곧바 로 '인물혐오증'이 발동하여 그를 질시하고 배척하려고 하는 것이다. 혼자 짝사랑하던 사람이 결혼했다고 배신당했다고 대성통곡 하고 다니는 꼴이다. 그러니 똑똑한 사람들은 그저 민중의 지도자로만 남아있고 정치는 머리를 남에게 빌리는 그래서 지식인들이 자기들 맘드로 떠들 수 있고 재수좋으면 기득권의 핵심부에 접근할 수도 있는 그런 정치인들만을 좋아하게 되는 것이다.

    '양심의 마스터베이션'이란 무엇인가 ? 그건 양심의 실천을 무책임하거나 미련하게 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민중을 아끼고 사랑 하는 양심은 있는데, 그걸 더러운 세상 현실에 접목시켜 실천하기엔 어려움이 너무 많다. 그런데 일부 사람들은 그 어려움에 대 해선 전혀 고민하지 않고 그저 현실은 무시한 채 양심만을 떠들어댄다.
하지만 이런 류의 비판은 현실론자와 이상론자를 양비론으로 싸잡아 비판하고 있다는 위험성이 있기는 하다. 마지막으로 많은 지식인들이 전혀 근거없는 전라도 혐오증에 빠져 있거나 또는 꼭 혐오증은 아니더라도 전라도의 문제 - 지역감정의 문제 - 를 터 놓고로 말할 수 없는 비겁함을 보이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 장면에서 저자의 비판은 거의 비난의 수준으로 드러나고 있다.

전 총리 김상협은 참회록을 써도 모자랄 판에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전두환은 "권력의 공백기에 핀치 히터로 등장, 위기 관리와 경제 재도약으로 멋진 안타를 때린 훌륭한 대통령"이라는 궤변이나 늘어놓고 다니질 않나. 그건 마치 강간을 당해서 애기를 낳았는데 그 애기가 참 똑똑하더라면서, 강간을 한 놈이 문제는 있었지만 종합적으로 '훌륭한 사람'이었다고 말하는 것 과 무엇이 다른가.

어떻게 정치적 허무주의를 극복할 것인가 ?

저자는 글을 맺으며 언론과 정치평론가들에게 더이상 정치의 해설은 집어치우고 정치의 심판관이 되어달라 고 주문하고 있다. 한국정치의 추악한 모습과 논리를 바로 보고 그걸 바로 잡도록 노력하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라고 주장하고 있 다.

다른 한편으로 국민들에게는 정치가 '김대중이 복귀할 것인가 ?' 따위의 가십거리에 관심을 쏟기 보다는 정치평론의 쓰레기더미 에서 탈출하여 올바로 정치를 볼 수 있는 가치관을 회복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정치는 심심풀이 땅콩이 이라하기에는 너무나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제 주사위는 우리에게 주어졌다. 생활의 주변을 돌아보면 시민들의 참여를 요구하는 부분이 너무나도 많다. 더구나 지방자치 의 시대에는 지역주민의 정치참여는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그리고 각 지역의 이슈는 다른 지역과는 각기 다른 고유의 특성을 갖게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에 대한 나름의 비판의식을 가질 수 있는 참여하는 시민들의 역할은 더욱 크다.

하지만 감히 시민들에게 참여를 요구하는 소리는 높지 않다. 그 이유 중에는 사회발전의 목표 부재와 정치혐오도 큰 부분을 차 지할 것이다. 목표의 부재라는 문제에서도 현재까지의 정치행태, 정치비평의 행태에 큰 책임이 있다. 하지만 저자도 지적하듯이 그런 쓰레기 더미를 뒤져서 버릴 건 버리고 재활용할 건 재활용하고 하면서 새로운 목표를 만들어가는 것도 시민의 과제가 아니 던가 ?

/* 덧붙이는 글 */
몇 년이 지났는데도 하나도 발전이 없는 것 같은 이 갑갑함은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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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묘군
책을 얘기한다 2007.02.01 12:09
/* (저자 주) 6년쯤 전에 썼던 독후감을 블로그로 옮겨왔습니다. */

'삼국지를 세 번 읽지 않은 사람과는 상종도 하지 말라' 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 만큼 삼국지는 동양인들에게 삶의 지혜를 알려주는 귀한 책으로 여겨 졌습니다. 소설은 물론이고 비디오, 만화, 만화영화 심지어 게임으로까지 삼국지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실로 다양합니다.

우리가 주위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삼국지로는 일본작가 吉川英治 ( 한자 표기가 맞나요 ? ) 가 번역한 것을 우리나라에서 재번역한 것이 있고 ( 이게 제가 제일 처음 완독한 삼국지입니다. ) 월탄 박종화가 번역한 일명 '월탄 삼국지', 김홍신의 번역판 그리고 이문열의 '평역 삼국지' 등 소설류로 된 것을 꼽을 수 있을 것이고 만화로는 단연 고우영의 삼국지를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 (저자 주) 이건 몇년 전 얘기이고. 현재로서 가장 추천할 만한 판으로는 황석영의 삼국지와 장정일의 삼국지를 꼽고 싶습니다. 특히 장정일의 삼국지는 삽화를 제가 좋아하는 김태권 선생님이 그려서 무척 눈이 즐겁습니다. 만화로 된 삼국지로는 이문열의 삼국지를 이희재 선생님이 그린 것이 그림이 좋습니다. 이희재 선생님의 그림체야 워낙 발군이라... */ 아직 제가 김홍신의 번역판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공평한 비교를 하기는 힘들지만 나름대로 평을 해보고자 합니다.

이문열의 평역 삼국지는 일단 원전의 충실한 번역이라는 점에서는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습니다. 특히, 일본작가의 것을 재번역한 것과는 확실한 수준의 차이가 있다고 할 것이다. 게다가 이문열 나름의 시적 감각으로 번역된 시구들은 이문열의 화려한 필치와 잘 어울립니다.

굳이 흠을 잡는다면 그의 삼국지가 '번역'이 아니라 '평역'이라는데 있습니다. '이문열'이라는 개인을 놓고 평할 때 흔히들 하는 것 처럼 '고시 공부하듯 책읽기를 한' 사람이라는 것을 곳곳에서 발견합니다. 시정잡배들조차 책은 '가슴'으로 읽는 다는 것을 다 알건만 그는 '머리'로만 책을 읽은 사람인 듯 합니다. 그래서 항상 현실에 대한 표피적이고 도식적인 이해만 존재할 뿐 현실을 이끌어가고 현실에 부대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래서 이문열의 삼국지를 읽다보면 원전을 번역한 부분에서는 잘 넘어가다가 평을 한 부분에서는 웬지 눈에 거슬리는 구절을 발견하곤 합니다. 그가 평을 좀 자제하기만 하였더라도 저의 등급판정에서 더 좋은 등급을 받았을 텐데...

/* 덧붙이는 글 */
요즘은 이문열씨가 그 때보다 훨씬 더 (*&(**^&^&*%&^%^라서 지금 썼다면 훨씬 더 시니컬한 서평이 되었겠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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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묘군
책을 얘기한다 2007.02.01 12:00
/* (저자 주) 6년쯤 전에 썼던 짧막한 독후감입니다 */

이 책을 어떻게 읽게 되었는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신문 광고를 보고 이 책을 알게 되어서 그냥 샀을 것 같다. 하지만 이 책만큼 또렷한 기억을 남긴 책도 많지 않을 것이다. 도정일 교수는 영문학을 전공하고 강단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는 교수다. 하지만 우리가 그를 기억하는 것은 영문학이 아니라 그가 이 세계에 대하여 갖고 있는 식견때문이 아닐까 ?

아마 잡지 '대화'의 창간호 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그가 대담한 내용을 읽으면서 그가 갖고 있는 날카로운 식견과 폭넓은 지식 그리고 달변에 매혹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의 책은 한 권도 읽지 않았고 그의 강의조차 한 번 들어본 적이 없지만 그의 팬이 되었고 그래서 그가 쓴 책이 민음사에서 출판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조금의 주저도 없이 책을 사고 말았을 것이다.

이 책은 물론 문학평론서이다. 여러 개의 문학작품을 제시하고 그에 대한 평을 해놓았다. 그렇다고 해서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작품을 다 읽을 순 없다. 그래도 좋다. 그래도 그 평을 통하여 작품을 보는 눈, 세상을 보는 눈을 배울 수 있으니깐 말이다. 나는 이 책에 물고기 다섯마리 /* (저자 주) 최고의 평점이라는 뜻입니다 */ 를 주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이제 공은 당신에게 넘어갔다. 읽던 말던 그건 당신의 자유다. 하지만 헛된 지식으로 부터 진정코 자유로와지고 싶다면 이 책을 읽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 덧붙이는 글 */
도정일 선생님의 글 중에서 비교적 최근에 읽은 것은 최재선 선생님과 대화를 나눈 것을 정리한 "대담" 이라는 책입니다. 물론 이 역시도 강추입니다. 최고의 지성이라 할 수 있는 두 분이 서로 다른 관점에서 (즉, 인문학자와 자연을 연구한 과학자) 어떻게 서로를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지 흥미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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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