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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5.28 :: 내 아이에게 들려주는 노무현 대통령 이야기
세상을 얘기한다 2009.05.28 13:36
들어가는 말

이제는 아련해져버린 기억을 저 너머를 뒤져 노무현이라는 한 정치인을 추억하고자 한다.

나도 나이가 많은 건 아니지만 우리 아이들이나 주변의 젊은이들과 얘기를 하다보면 내가 겪었던 소중하고 중요한 기억들이 그저 그렇고 그런 옛날 일로 치부된다는 걸 보고 놀랄 때가 많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즈음하여 "왜 노무현인가?"에 대한 생각이 서로 다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느끼며 내가 기억하는 노무현 대통령을 내가 경험하는 역사의 지평 속에서 소개하고자 한다. 내 감성 속에 남아 있는 노무현을 강요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잊고 싶지는 더 더욱 않기에...

5공 청문회 스타 노무현

티비에서 여러 번 언급해서 5공 청문회 스타로 노무현 전대통령이 유명해졌다는 얘기는 5공 청문회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청문회 한 번으로 무명 정치인이 스타가 된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5공 청문회가 열린 것은 1988년이다. 1987년 6월의 민주화 항쟁의 구호는 "호헌철폐 독재타도"였다. 그보다 7년여전  전두환 대통령은 국민들이 뽑지 않고 소위 체육관 선거라고 불리는 간접 선거를 통해서 선출되었다. 물론 선거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국민들이 뽑는 구조이긴 했지만 어쨌든 당시 상황에서는 전국적인 지지를 얻고 있던 김영삼이나 김대중을 정치 신인 전두환이 이길 방법은 그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체육관 선거를 한번 더 치러서 구데타 공신 2순위인 노태우를 대통령으로 뽑으려던 참이었다. 이에 분노한 시민들은 현재의 헌법을 개정해서 직선으로 대통령을 뽑자고 했다. 유난히 뜨거웠던 1987년 6월의 항쟁에 굴복한 여당은 요구를 수용하기에 이르고(이것이 노태우의 6/29 선언) 박정희에 이어 전두환으로 계속되는 군부독재를 민주적 절차를 통해 끝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다. 물론 이 기회는 양김씨(김대중/김영삼)가 서로 상대가 양보하고 자기로 대통령 후보를 단일화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단일화는 실패하고 양김씨를 지지했거나 후보단일화를 요구했던 재야 운동권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분열시키고 -- 그 분열은 아직도 진행형 -- 노태우의 집권 즉 군부독재의 연장으로 이어진다.

노태우씨가 대통령이 되긴 했지만 1987년의 뜨거운 시민들의 요구는 막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와 수렴 청정의 길로 접어들려던 권력자인 전두환씨의 야심을 저지하고자 하는 것으로 이어졌고 결국 국회가 직전 권력 (사실은 수렴청정 중인 현 권력) 을 국회로 불러 전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청문회를 여는 것으로 결실을 맺게 된다.

시민들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장세동(안기부 --지금의 국정원-- 장, 대통령 경호실장), 당시 최고의 부자였던 정주영 이런 사람들이 증인으로 국민의 대표 앞에서 진실을 추궁당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하지만 진실이 드러나길 기대했던 시민들은 이내 큰 실망에 빠진다. 증인들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한결같은 증언만 되풀이 하고 진실을 캐내야 할 국회의원들은 아직 권력을 쥐고 있는 증인들의 눈치만 살피는 비굴한 상황이었다. (우리 역사상 국회의원들이 이렇게 비굴한 모습은 그 전에도 없었고 -- 아마 있어도 공개되지 않아 볼 수 없었을 것이고 -- 그 이후에도 없었다. -- 민주화의 성과로 이제는 국회의원 끗발이 엄청 쎄졌다. 요즘 국회의원들 보면 지가 잘나서 쎈 줄 알지만 다 국민들이 뒤에 있기 때문이라는 걸 늘 잊고 지내는 듯.)

이런 와중에 단 한 사람 (아마 하느님이 국회를 멸하려 천사를 보냈다면 국회는 불지옥을 경험했을 듯. 단 한사람의 의인 밖에 없었으니까) 의 국회의원이 있어 그나마 국민들의 마음을 드러내었으니 (드러내기만 했지 현실적으로 뭔가 캐내지는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5공화국의 비리와 참상은 노태우씨에 이어 김영삼씨가 대통령이 되고 두 전 대통령들이 나란히 법정에 서기까지 또 많은 시간을 기다려서야 쬐끔 밝혀지게 된다.) 그가 노무현이다.

개인적으로는 청문회를 보면서 당황스러웠다. "아 저렇게 말해도 되는거구나. 저래도 안 잡아가는구나." 하는 충격이 그 첫번째고 이는 이내 "왜 다른 국회위원들은 저렇게 하지 않는가?" 하는 분노로 이어졌다.

지금에야 아무것도 아닌 촌부들도 블로그를 통해 자기 얘기를 할 수 있게 되었고 (정말? 요즘 들어 분위기 안 좋지만 그래도 5공에 비하랴) 검사가 감히 대통령에가 막가자고 대들고 국회의원이 장관, 총리 불러 놓고 몰아부치고 하는 것이 별거 아닌 게 되었지만 그때만 해도 감히 권력에 대해 얘기한다는 것 자체가 금기아닌 금기였던 시대였다.

그 금기의 벽을 첨으로 넘어서서 금단의 땅을 열어 젖힌 자. 그가 노무현이다.


3당 합당을 거부하고 지역을 넘어선자 노무현

1990년에 감행된 3당 합당(대개는 3당 야합이라고 부름)은 실로 엄청난 사건이었다.

당시 국회는 집권 여당인 민정당이 과반이 못되는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고 호남을 기반으로 한 평화민주당이 두번째 영남을 기반으로 한 통일민주당이 그 다음 그리고 충청 지역에 기반한 신민주 공화당이 뒤를 잇고 있었다. 이러한 수치 뒤에 가려진 또 하나의 모습은 당시 사람들의 지지 성향이다. 민정당은 보수층의 지지를 받고 있었고 전국적인 지지기반을 갖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공화당의 계보를 잇는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은 보수층 + 충청 지역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두 민주당은 각기 영호남이라는 지역기반의 지지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진보층의 지지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극단적으로 단순화 하자면 영남쪽 연고를 두고 있는 진보층은 통일민주당 지지자들이 상대적으로 많고, 호남측 연고라면 통일민주당 지지자가 많은 뭐 이런 식이고 상당수는 오락가락 양쪽을 지지하기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통일민주당에서는 영남쪽 국회의원 선거에 주로  후보를 내고 평화민주당은 호남쪽에 주로 후보를 내는 선거 전략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1987년 6월의 시민 대항쟁은 이후 7,8,9 대투쟁이라고 불리는 전국적인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이어지고 각종 노동단체, 재야단체, 시민단체들이 무럭무럭 성장하면서 정치권의 대안 세력으로 부상하고 이 과정에서 독재정권과 여러 곳에서 충돌을 빚고 학생들의 분신, 수배 중이던 사람들의 의문사가 줄을 잇던 그런 시절이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한나라당 공천으로 경기도 지사로 있는 김문수씨도 이때 즈음 유명했던 노동자 조직 사건으로 수배와 투옥을 겪었던 사람이다. 인생유전.)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전교조가 태동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전교조 이전 세대로서 선구적인 진보파 선생님 출신 이재오 국회의원을 보면... 인생유전2) 한마디로 전국이 민주화의 열기로 후끈한 시대였다.

국회에서 과반 확보에 실패한 민정당은 이런 상태로 계속 가다가는 결국 정권을 뺐기게 되고 그들의 원죄 (쿠데타와 광주 학살) 때문에 법정에 설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에 (참고로 내란죄는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 어떻게든 권력을 유지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다음 대통령이 김영삼 아니면 김대중 두 사람 중 하나가 된다는 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상황이었다.

이때 민정당은 승부수를 던진다. 김영삼을 영입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더욱 권력을 굳건히 하기 위해서 김종필까지 끌어들인다. 그래서 민정당 + 통일민주당 + 신민주공화당이 하나의 당으로 합쳐져 민주자유당이 된 것이다. (음... 당시 일본의 집권당은 자유민주당. 앞뒤만 바뀐거잖아?) 모르긴 몰라도 김영삼에게는 다음에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유리한 기반을, 군부독재 세력에게는 법정에 끌려나가지 않아도 될 정권유지를, 그리고 김종필에게는 완전 듣보잡으로 정당 문을 닫지 않고 수명을 연장할 기회를 주는 상생(ㅠㅠ)의 정치였던 셈이다.

3당의 합당으로 독재는 영원히 계속될 것 처럼 보였고 민자당에게 입당하는 자에게는 평생의 부귀영화가 그리고 그 반의 편에 선 사람들에게는 고달픈 나날이 (국회의원들도 최루탄 맞고 전경에게 질질 끌려 닭장차에 실려가던 시절이다) 이어질 것이 명백한 그런 순간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고 그 민자당이 현재의 한나라당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런 순간에 그 평탄한 길을 가지 않고 과감하게 남은 7인의 국회의원이 있었으니 그 중의 한 사람이 노무현이다. 그에게는 이 결정이 더욱 힘들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왜냐하면 이는 그를 국회의원으로 만들어준 김영삼을 배신하는 것인데다가 스스로는 아직 입지가 없는 초선 의원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 그는 평화민주당(당명이 바뀌었는지는 기억이 불분명) 소속으로 부산에서 계속 출마해서 구데타의 주역이었던 현직 국회의원에게 연이어 세번이나 패배하는 그 유명한 사건을 일으킨다. 김대중씨의 영향력하에 있는 당의 출신으로 영남에서 출마한다는 것 자체가 금기를 넘어서는 엄청난 용기였고 (나는 대학가기 전까지만 해도 김대중이 간첩이라는 말, 영남 번호판 달린 차는 호남가면 주유소에서 기름을 안 넣어준다는 말, 김치 값이 비싼 이유는 배추가 비싸서이고 배추가 비싼 이유는 호남지역에서 배추를 영남에만 비싸게 팔기 때문이라는 말이 사실인 줄 알고 살았다) 무엇이 노무현을 다른 모든 정치인들고 다른 존재로 만드는가를 설명한다. 그리고 그 다름이 그를 국민의 여망을 등에 입은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나오는 말

이제는 사진첩의 낡은 흑백 사진 처럼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던 기억을  되살리며 새삼 이런 말을 되새긴다.

"우리 나라에도 자랑할만한 정치인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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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