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을 얘기한다 2007. 2. 2. 13:36

/* (저자 주) 1995년 6월에 모 잡지에 기고한 글입니다 */

요즈음 가전제품의 선전을 보면 참으로 묘한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 '더욱 간단하게, 더욱 작게' 라는 스로건을 모두들 표방하고 있다. 예전에는 화려한 기능이 각광을 받은 반면 이제는 간단한 기능을 추구하는 경향이 높아지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 ? 여러가지의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중요한 요인의 하나로서 '소비층의 다양화' 라는 측면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가끔 텔레비젼을 통해서 방송국에서 사용하는 방송장비의 모습을 언뜻 언뜻 볼 수가 있는데 우리같은 문외한으로서는 장비가 굉장이 복잡하게 생겼다는데 그만 질려버리곤 한다. 더욱 강력한 기능을 제공하기 위해서 장비는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가전제품에서는 '딱한번', '초간편' 이 가장 중요한 장점으로 부각되는 것인가 ? 방송국의 방송장비야 전문가들이 매일 사용하는 장비지만, 집에있는 브이티알은 어쩌다 한번 그것도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이 사용하는 것이라는 점이 가장 중요한 차이점일 것이다. 모두들 집에 있는 브이티알을 생각해보라 ! 거기에는 틀림없이 예약녹화를 위해 시간을 맞추어 놓도록 되어있지만 당장 당신의 집에 있는 브이티알에는 '12:00 AM' 이라는 숫자가 허구한 날 깜빡이고 있을 것이다. 예약녹화를 위해서 시간을 맞추어 놓고 있는 집은 아마 1 % 도 안될 것이다. 그러다 보니 가전제품을 만드는 사람들로서는 다양한 기능 보다는 간단한 사용성이라는 점에 집착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컴퓨터 분야 특히 소프트웨어 분야로 오면 이 얘기는 정반대로 바뀐다. 어느 보고서에 따르면 '프로그램은 2년에 2배씩 커진다' 고 한다. 지금 잘 돌아가고 있는 당신의 최신형 컴퓨터도 2년 길게 잡아도 4년 뒤에는 평범한 프로그램을 올리기에도 용량이 부족한 구시대의 유물이 되고 말 것이다.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은 최신형의 컴퓨터를 이용해서 앞으로 나올 컴퓨터에서나 돌아갈 점점 더 큰 소프트웨어 - 다르게 말하면 점점 더 뚱뚱한 소프트웨어 - 를 만들어대고 있는 것이다.

컴퓨터를 만들어 파는 사람들의 입장에서야 칭찬할 일이지만 제한된 재정을 가지고 문화생활 ( ? ) 을 즐기려는 일반 사용자들에게는 소름이 돋을 일이다. 당장 내가 이 원고를 쓰고 있는 컴퓨터도 이 원고를 쓰도록 도와주고 있는 워드 프로세서를 돌리기에는 역부족인듯 버벅거리고 있다. 아마 이 워드 프로세서의 다음 버전은 이 컴퓨터에서 돌아가지도 않을 지 모른다. 그러면 난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버린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이제는 잡지에서도 언급하지 않는 구식 워드 프로세서의 사용자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항상 새로운 버전이 업그레이드할 가치가 있을 만큼 충분히 더 좋은가 하는 문제는 생각할 여지가 많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워드 프로세서에서 내가 쓰고 있는 기능은 얼마나 되며, 새로운 버젼은 내가 없어서 아쉬워하던 바로 그 기능을 제공할 것인가 ? ( 거의 그런 경우는 없다 ! ) 만약 지금 쓰고 있는 소프트웨어가 도저히 업그레이드를 하지 않을 수 밖에 없을 만큼 문제가 있다면 그걸 만들고 상품이랍시고 팔아먹은 놈은 또 얼마나 나쁜 놈인가. 소프트웨어 개발자의 후안무치는 단지 뚱뚱한 소프트웨어로 소비자를 질리게 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다보면 누구나 소위 '버그' 라는 제품의 결함과 마주치게 된다. 사용자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한 어떤 동작이 소프트웨어에 의해 거부 당하고 '프로그램을 종료하겠다' - 누구 마음대로 ! - 든가 '업체에 연락을 주십시요' - 안그래도 작업을 날려서 황당한데 친절하게 전화까지 해줘 ? - 라든가 '시스템 관리자에게 물어보라' - 내가 시스템 관리잔데 누구한테 물어본담 ! - 든가 라는 메시지를 화면에 남겼을 때 사용자는 개발자의 오만함에 대하여 아무런 대항도 못하고 컴퓨터를 재시동 하곤 한다.

하지만 가전제품으로 돌아가보자 텔레비전을 보면서, 세탁기로 빨래를 하면서 '버그' 때문에 속상한 적이 있는가 ? 아마도 거의 - 전혀 ! - 없을 것이다. 물론 소프트웨어가 가전제품보다 만들기에 복잡하고 결함을 생산단계에서 모두 발견하기 어렵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러한 결함을 '버그' 라는 어정쩡한 말로 얼버무리면서 넘어갈 수는 없는 것이다. 이는 틀림없이 소비자에 대한 기만이며 프로그램 사용계약의 약점을 교묘히 악용한 것이다.

정품 소프트웨어를 구입하면 항상 '프로그램 사용계약서' 가 따라온다. ( 대개는 디스켓이 들어있는 허연 봉투의 겉면에 적혀있다. ) 그것을 꼼꼼히 읽어본 소비자가 얼마나 될까 ? 거기에는 틀림없이 이렇게 적혀있다. 주의 - 개봉하기 전에 다음을 반드시 읽어 주십시오. 봉인된 이 디스켓 패키지를 개봉하는 것은 프로그램 사용계약서 내용에 동의함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모두들 그냥 일단 뜯어서 설치하고 본다.

이번에는 프로그램 사용계약서를 읽어보자. 구구절절이 기가 막히지만 단연 압권은 이런 구절이다.

보증 :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어떠한 보증도 하지 않으며, 프로그램의 수행과 그 결과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사용자가 책임을 집니다. 프로그램의 결점이 발견되더라도 이에 따르는 서비스, 정정에 대한 비용은 사용자가 부담합니다.

예를들어, 워드 프로세서가 어떤 결함이 있어서 하드 디스크를 날리든 모니터를 태워먹든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리고 보증기간이 무슨 소용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보증기간에 대한 언급이 있긴 있는데 그나마 90일로 되어있다. 90일이면 대부분의 평범한 사용자로서는 아주 기초적인 기능을 익히는 수준이고 그동안 문제점을 발견하더라도 자신의 조작미숙인 것으로 생각하고 넘어가기 쉽다.

사회가 정보화되면 될 수록 소프트웨어에 대한 의존은 커질 것이다. 사회의 상호의존성이 높아 질수록 각 소프트웨어의 결함이 가져올 위험성도 커지고 있다. 소프트웨어의 사소한 결함으로 핵폭탄이 날아갈 수도 있고 은행이 파산할 수도 있다. 나 자신도 소프트웨어 개발자의 한 사람으로서 소프트웨어의 무결성이란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안다. 하지만 더 이상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은 '버그' 라는 핑계와 무책임한 프로그램 사용계약서 뒤에 숨어서 안주해서는 안된다. 프로그램 개발자들의 사회적 책임성이 절실히 요구되는 세상이 오고 있는 것이다. 만국의 프로그래머여 자성하라 !

posted by 신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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