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얘기한다 2007. 2. 2. 14:38

/* (저자 주) 2000년 10월 16일 쓴 글입니다. 새로운 최상위 레벨 도메인의 추가를 둘러싼 논쟁을 소재로 합의를 이루는 과정에 대한 저의 고민을 정리한 글입니다. */

[들어가기 전에]

기타리스트 이병우의 음반 "생각없는 생각"을 듣는다. 이병우의 기타 연주는 나르시스 예페스처럼 엄격하지 않으면서 가즈히코 야마시타처럼 주눅들게 하지 않고 존 윌리엄스처럼 거만하지도 않다. 그저 평범한듯 들려주는 그의 기타 소리는 언젠가 그가 양희은과 함께 녹음한 음반에서처럼 그저 뒤를 받쳐주는 소리로서 더 적절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흡사 장필순의 보컬이 그런 것처럼.

[들어가면서]

가히 혁명이라는 말로 표현을 해야할 정도로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 인터넷 열풍. 산업을 송두리째 바꾸고 전세계 사람들의 일상을 바꾸어 버리고 급기야는 가치마저 바꾸려고 하는 - 이미 일부 영역에서는 가치마저 바뀌었다 - 이 엄청난 열풍. 그 인터넷의 핵심에 있는 자원인 IP 주소와 도메인 이름의 관리를 맡게 된 ICANN에게 중요한 두 차례의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

첫번째는 일반 회원 선거 (At Large Membership Election) 에 의한 이사의 선출이다. 이 선거는 그 결과야 어찌되었건 간에 국경을 초월하여 전세계의 네티즌이 동시에 참여하는 선거라는 점에 있어 획기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많은 부정적인 요소들이 예견되었고 그 중 상당수는 현실로 나타났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도 있듯 단 한번의 선거에서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는 없었지만 민주주의 중요한 토대가 하나씩 만들어져 간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을 찾아야 할 것이다. 앞으로 네티즌의 직간접적인 참여로 ICANN이 진정한 의미에 있어 상향식 합의 도출 (bottom up consensus building) 에 의해 운영이 되는 기구가 되길 기대해 본다.

ICANN이 맞이하고 있는 중요한 두번째의 사건은 새로운 일반 최상위 레벨 도메인 (new generic top level domains: new gTLDs) 의 추가이다. 그동안 일반 최상위 레벨 도메인이 여럿 있기는 했지만 그 중에서 .com / .org / .net 영역만이 '일반적'으로 활용이 가능한 상황이었고 전자 상거래 등 상업적인 영역에서 인터넷 활용의 증가로 .com 도메인 영역은 이미 과포화 상태가 되어 있다. 따라서, 새로운 일반 최상위 레벨 도메인을 추가한다는 것은 이러한 인위적 결핍 (artificial scarcity) 의 시대를 끝내고 풍요로운 도메인 이름의 시대를 여는 중요한 사건이다.

하지만 새로운 도메인을 추가하는 것이 기술적인 문제이기만 하다면 풀기가 간단할 텐데 문제는 예전에 .com 을 만들 때와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점이다. 예전과는 달리 지금은 도메인 이름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그 도를 넘어서서 그에 대한 투기와 뺏고 뺏기는 송사가 이곳 저곳의 법원에서 또는 WIPO를 비롯한 UDRP (Uniform Dispute Resolution Procedure) 를 위한 대안적 중재기구에서 일어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저 관리 기능 수준이었던 도메인 이름 등록 서비스가 엄청 사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NSI 사가 보여줌으로써 새로운 일반 최상위 레벨 도메인의 등록 권한을 따내고 그를 발판으로 엄청난 수익을 올리려는 기업들의 움직임도 부산하다. 또한, 도메인 이름 영역에까지 자기 브랜드의 파워를 확장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대기업들은 이번에 추가될 새로운 영역에서도 자기들의 권리를 더욱 굳건히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상태에서 새로운 최상위 레벨 도메인을 추가하고 그 후유증이 심하지 않도록 하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닌 것이다.

이번에 새로운 일반 최상위 레벨 도메인 사업을 하겠다고 ICANN 에 제출된 제안 중에는 .web / .nom 처럼 누구나 쓸 수 있는 도메인이 있는가 하면 .union / .museum 처럼 특정한 조건을 만족하는 단체나 기구만 등록할 수 있는 도메인도 있다. 이렇게 등록자가 누구냐에 따라 구분하는 것 외에도 등록된 도메인을 통하여 제공하려는 서비스의 내용에 따라 구분하는 것도 있다. 이런 예로는, .kids / .xxx 가 있다. 앞엣 것은 어린이용 컨텐츠만 다루는 사이트를 위한 것이고 뒤엣 것은 성인물만을 다루는 사이트를 위한 것이다. 용어를 혼용하여 쓰는 경우도 있지만 굳이 구분을 하자면, 등록자의 자격을 기준으로 등록을 제한하는 도메인은 면허 도메인 (chartered domain) 이라고 하고 등록된 도메인 이름을 이용하여 할 수 있는 사업의 내용을 가지고 등록을 제한하는 도메인은 제한 도메인 (restricted domain) 이라고 부른다.

최근에 인터넷에서는 제한 도메인에서 제한을 강제할 수 있는 '주체'가 누구냐를 둘러싸고 많은 논란이 있다. 물론, 이 논란의 배경에는 ICANN 의 권한이 강화되는 것이 바람직한지 제한되는 것이 바람직한지, 표현의 자유는 과연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하는지, 업계의 자율 규제라는 것이 전지구적 차원에서 얼마나 제대로 동작할 수 있는 것인지, 자본의 운동 모멘텀을 시민 사회가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을지 이러한 그동안의 모든 고민이 복선으로 깔려 있다.

[뭐가 문젠데 ?]

그럼 과연 .kids 도메인을 둘러싼 제반 상황은 어떠한지 정리를 해보자. 제안을 한 회사는 .Kids domain 이라는 이름의 회사이고 이 회사는 어린이들도 볼 수 있는 컨텐츠로만 구성된 사이트들의 최상위 레벨 도메인으로서 .kids 를 제안했다. 이번에 추가되는 새로운 일반 최상위 레벨 도메인은 등록규정을 제안한 회사가 나름대로 정의할 수 있고 이를 ICANN에서 승인을 받으면 된다. 각 회사가 ICANN에 제안한 도메인은 먼저 재정적 / 기술적인 측면에서 검토를 거친 뒤 사람들로 부터 공개 의견 (public comment) 을 받은 다음 ICANN 이사회에서 결정될 것이다. 논란의 대상이 된 .kids 도메인 제안의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유명한 상표에 대하여는 먼저 등록하게 할 수 있다.

* 일반적인 이름에 대하여 .com 에 있던 것이 .kids 로 올 수 없게 한다.

* 여러 사람이 같은 이름에 대하여 상표를 갖고 있다면 그 같은 이름의 도메인을 공유하여 사용자의 선택에 따라 서로 다른 사이트로 연결되게 할 수 있다.

* 도메인을 등록 한 뒤 4개월 이내에 웹 사이트를 만들어야 한다.

* 광고나 컨텐츠에 포르노, 술, 마약, 총이 들어가는 것은 안된다.

* 1년 단위로 컨텐츠에 대하여 감사를 한다.

* 규정을 어기면 도메인을 폐쇄한다.

얼른 보기에도 기존의 .com / .org / .net 도메인과는 매우 다른 등록정책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각각에 대하여 모두 치열한 논쟁이 가능한 영역이다. 그런데 주로 논쟁은 '.kids 도메인에 포르노물이 올라가지 못하도록 한다는데 그것을 강제할 권한이 누구에게 있는가' 를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다.

첫번째의 논쟁 이슈는 .kids 를 운영하는 회사를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즉, 어린이들이 볼 수 있는 컨텐츠 사이트만 등록 받겠다고 해놓고 일단 .kids 를 따 낸 뒤에 이를 발판으로 어린이를 상대로 비윤리적인 상행위를 하는 사이트를 마구 받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 따라서, 이 회사가 정말 '도덕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회사인지 자세히 조사를 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는 않다. ICANN은 IP 주소 자원과 도메인 이름 체제에 대한 '기술적인 조정'을 하는 곳이어야지 '도덕'에 대하여 '판단'을 하는 기구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행위라는 것이 어떻게 완벽하게 사회적인 영향을 고려하지 않고 기술의 관점에서만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문제제기와 인터넷에 있어서 어린이와 여성은 굉장한 취약성을 드러내기 때문에 이에 대한 배려는 도덕적 판단의 차원을 넘어서 꼭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두번째 논쟁 이슈는 면허 도메인 (chartered domain) 이나 제한 도메인 (restricted domain) 에서 제한 규정을 누가 어떻게 통제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냐 하는 점이다. 즉, 도메인의 등록 자격이 무엇인지 또는 등록된 도메인을 이용해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규정을 만들고 개정할 수 있는 권한을 누구에게 줄 것인지가 문제이다. 첫번째 이슈에서도 제기되었듯이 ICANN으로부터 승인을 받을 때 제출된 등록 규정을 이후에 그 업체가 마음대로 개정할 수 있다면 그 업체는 자기 밑으로 등록된 모든 사이트에 대하여 등록 자격과 사업 내용에 대한 완전한 틍제권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권력은 일찍이 그 어떤 기관 심지어는 그 어느 국가도 갖지 못했던 막강한 권력이다. 즉, 마음만 먹는 다면 독점에 의한 횡포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가 될 수도 있다. 반면에, 이들 도메인에 대한 등록규정의 개정 권한을 ICANN에게 준다면 이 또한 ICANN이 전세계 모든 사이트를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다는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이 이슈에 대한 타협적인 안으로서는 일단 승인이 난 도메인의 등록규정에 대하여는 ICANN이 간섭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소비자의 권리나 도메인 이름 사용자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활동은 ICANN이 하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물론, 이에 대하여는 어디까지가 '최소한'인가를 둘러싼 논쟁거리가 여전히 남게 된다. 즉, 무지무지 잘 드는 하지만 손은 절대로 베지 않는 부엌칼을 만들자는 얘기가 될 수 있다.

어떤 대상에 대하여 간섭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그 대상이 사실상의 독점인데 그 독점의 폐해는 막아야 한다는 목표는 애초에 상호 모순되는 목표이다. 이렇게 상호 모순되는 목표를 그대로 수용하게 되면 그 일을 진행하는 실무자들의 가치관이나 능력에 따라 다양한 결과가 나타나게 된다. 더군다나 이러한 일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많은 인력을 충분한 시간동안 투입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또 얘기가 다르겠지만 제한된 실무자가 주어진 시간 내에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지금의 ICANN (또는 한국 인테넷 정보 센터도 이런 관점에서는 마찬가지라고 보인다) 에 있어서 모든 사람들이 수긍할 수 있는 지혜로운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그 외에도, .kids 와 .xxx 를 같은 회사가 동시에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비영리 최상위 레벨 도메인의 운영자와 그 도메인을 사용하는 비영리 단체간의 관계는 어떠하여야 하는지, ICANN 이 꼭 간여해야할 핵심적인 문제는 과연 어디서 어디까지 인지 등 다양한 이슈가 있다.

[그래서 어떻게 풀지 ?]

이상의 논쟁에서 볼 수 있는 것 처럼 업계의 자율 규제를 믿을 수 있거나 그들의 행태에 대하여 소비자 또는 시민 사회가 충분히 제어를 할 수 있다고 보는 쪽에서는 당연히 .kids 도메인에서의 내용 규제가 도메인 등록을 받는 업체와 여기에 등록하여 사업을 하는 업체간의 계약에 의하여 굴러가길 바란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영리를 추구하는 회사들이 어차피 영리를 위해서라면 어떻게든 교묘하게 원하는 방향대로 끌고 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ICANN이 어느 정도 통제권을 쥐는 것이 불가피 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ICANN이 각 사이트의 컨텐츠 자체에 대하여 통제권을 갖는 것에 대하여는 모두들 반대한다.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공권력에 의한 컨텐츠 규제는 절대로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미국을 중심으로 한 시민 사회 섹터의 공감대이다.

이러한 논쟁에서 나온 모든 의견을 수렴하여 하나의 목표 수준을 설정한다면 이렇게 된다. "ICANN 은 향후에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없도록 치밀하게 상황을 고려하여 결정하되 그 결정의 결과로 발생하는 사적 영역의 문제에 대하여 간여하여서는 안된다". 하지만 세상의 일이라는 것이 그 일이 일어나기 전의 상황과 그 일 자체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난 뒤의 상황이 모두 연결되어 있는 것인데 극히 제한된 부분에만 간여하면서 전체를 조율해 나간 다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 어떤 결정이 "결정적"이지 않다면 그러한 결정을 내린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

어렸을 때 받은 반공 교육이 생각 난다. 길에서 북괴나 국내의 불온 세력이 뿌린 '불온' 삐라를 발견하면 그 내용을 읽어보지 말고 (읽으면 물드니까 !) 가까운 경찰서에 신고하라고 했다. 그런데 어찌 읽어보지 않고 '불온' 삐라인지 알 수 있는 것일까 ? 혹시 이게 바로 '생각없는 생각'의 경지인가 ?

이렇게 모순된 목표를 달성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ICANN은 어떻게 행동하여야 할까 ? 이러한 상황은 꼭 ICANN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한국 인터넷 정보 센터에서도 각종 정책의 이슈를 둘러싸고 똑같은 논란이 수도 없이 일어난다. 심지어는 웬만한 회사들에서도 관리의 역할을 하는 부서에서는 흔히 이러한 고민이 발생한다. 이 고민에 대하여 딱 맞아 떨어지는 해결책은 아직 없는 듯 하다. 있다면 벌써 써먹었지 이렇게까지 고생스러운데 방치되고 있을리가 없다. 수천년을 이어오며 발전시켜온 인류의 지혜가 아직은 이러한 문제를 푸는 단계에 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나오면서]

원고 청탁을 받고 .kids 도메인을 둘러싼 논쟁을 소재로 글을 써야 겠다고 결정을 하였을 때에는 글을 쓰다보면 어느 정도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글을 쓰면 쓸수록 그런 목표는 멀어지고 점점 더 풀기 어려운 문제로 느껴졌다. 어쩌면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단초가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본 것이 신라의 '화백'제도이다. 화백 제도에서는 만장일치에 의하여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어떻게 만장일치가 가능했을까 ? 그 때에는 세상이 단순해서 세상의 모든 이슈가 '참이냐 거짓이냐', '정의이냐 불의이냐' 로 구분가능하기 때문이었을까 ?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만장일치는 하나의 합의된 결론이 나올 때까지 '충분히' 고민하고 지혜를 모았다는 의미가 아닐까 ? 고민하고 토론하고 지혜를 모으는 과정에서 어떤 결론에 대하여 모두가 서로를 설득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만장일치가 가능하였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다수결이라는 천박한 서구식 민주주의의 도구적 합리성에 매몰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대부분의 판단은 그 보다 더 천박한 자본의 논리를 따르고 있고.

누구나 자기가 처한 상황에 따라 자기의 견해가 있다. 그러한 견해들을 솔직히 내어놓고 서로 역지사지의 심정으로 고민을 하고 결론을 도출하고 도출된 결론을 자기의 위치에 따라 이해하고 수긍하려는 노력, 이런 노력이 그 동안 인류가 도달해 본 적이 없는 전지구 차원에서 네티즌들의 자발적인 협력에 의한 인터넷 유토피아를 열어가는 출발점이 되는 것은 아닐까 ?

posted by 신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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