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을 얘기한다 2007.02.02 13:42

/* 1995년 7월에 모 잡지에 기고한 글입니다. 이 글에서는 특히 스스로 컨텐츠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우리 토양의 한계를 우려하고 있습니다. 비록 최근 들어서 UCC의 인기는 스스로 컨텐츠를 생산하는 우리 누리꾼들의 자발성과 창의성을 보여주지만 그 대다수가 여전히 카피 컨텐츠라는 점은 아쉽습니다. */

정보화, 세계화 이런 말들은 더 이상 어떤 전문가들의 용어가 아니라 일상용어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모든 사회의 변동은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문화토양에 영향을 받으며 그 문화토양에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사회는 정보화, 세계화 할 수 있는 문화토양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갑자기 유행하기 시작한 세계화도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성과를 거두고 있지 못한 것은 그를 주도하는 집단이 무성의하거나 무력해서라기 보다는 세계화의 대상인 동시에 주체인 우리나라 사람들이 갖고 있는 문화토양의 척박함 때문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정보화를 가로막고 있는 우리 사회의 문화토양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기로 하자.

맨 먼저 손꼽을 수 있는 것은 대화문화의 부재를 들 수 있다. 정보화는 새로운 대화의 양식을 제기한다. 입으로 하는 말로 매개되던 대화가 컴퓨터를 매개로 하는 대화 ( CMC : Computer Mediated Communication ) 로 바뀌고 있다. 이 대화의 세계에서는 나이나 지위, 인종, 장애 등의 외형적인 조건보다는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대화의 중심에 서게 된다. 따라서 어떤 선입관에 사로잡혀서 자기의 주장만 내세우는 사람은 컴퓨터를 매개로 하는 대화의 시대에는 따돌림을 받게 된다.

새로운 대화 방식과 관련하여 한가지 생각해야할 점은 익명성에 대한 것이다. 익명성 ( anonymity ) 이라는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내지 않고 사이버 스페이스 ( cyberspace ) 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익명성은 남들이 내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아무 얘기나 마구 할 수 있다. 예를들어, 회사와 같은 조직에서 구성원들의 불만과 고충을 제대로 수렴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지만 익명성을 보장할 수 있는 대화매체 ( 익명의 전자편지, 익명의 전자게시판 등 ) 를 제공한다면 밑바닥의 소리가 조직의 상부에까지 자유롭게 전달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익명성에는 두가지 상반된 문제가 있다. 우선, 무책임한 발언, 비난이나 유언비어의 유포를 막을 길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흡사 선거때마다 등장하는 후보에 대한 흑색선전과 마찬가지로 비록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명백하더라도 비난을 받은 사람에 대한 이미지가 구겨지는 것을 피할 수는 없을 뿐만 아니라 많은 경우에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는 것이 그리 쉬운 일도 아니라는 것이 문제가 된다. 익명성에 대한 두번째 문제점은 익명성을 빙자한 감시의 눈길을 피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컴퓨터 기술은 비록 익명의 전자편지나 전자게시판이라고 하더라도 마음만 먹으면 실제 사용자가 누구인지를 알아낼 수 있도록 할 수가 있다. 그렇게 되면 수사반장에 나오는 취조실 처럼 안에서는 자기들만 있는 줄 알고 대화를 나누지만 밖에서는 유리처럼 투명하게 방안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것이다. 다니엘 벨이 '텔레마틱 소사이어티 ( Telematique Society )' 에서 주장한 대로 우리는 어항속의 금붕어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한편, 정보사회는 정보가 힘의 근원이 되는 사회이다. 정보의 유통은 세가지 요소 즉, 사람, 정보, 매체가 갖추어져야 가능하다. 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각종의 정보화 관련 사업을 보면 매체 ( 고속 통신망의 구축, 위성사업, CATV 등 ) 라는 측면에 집중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정작 그 매체가 구축된 후 그 매체를 타고 돌아다닐 정보와 그 정보을 생산하는 생산자인 사람이라는 요소에 대한 투자는 약하다는 느낌이 든다. 간단한 응용 프로그램을 돌리기에도 역부족인 엑스티 ( XT ) 급 컴퓨터를 교육용 피씨 ( PC ) 라고 해서 전국 각급 학교에 깔아놓고 컴퓨터를 가르쳐야할 교사들에게는 코볼이나 포트란을 가르치고 있는 현실은 결코 정보사회를 준비해가는 인재교육 방식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더욱 큰 문제인 것은 유통할 정보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정보는 가공 상태에 따라 일차정보 ( 즉, 가공되지 않은 정보 ) 와 이차정보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차정보에 속하는 것은 주어진 일차정보를 분류 기준에 따라 분류한 것, 내용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도록 해주는 색인 정보, 각종 정보에 대한 통계자료 ( 백서 White Page 정보가 이에 속한다 ) , 자료가 있는 곳을 정리해서 알려주는 엘로우 페이지 ( Yellow Page 전화번호부가 노란색 종이에 찍혀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는 지요 )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차정보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우선 그런 정보 정리작업을 할 수 있는 전문인력과 도구 ( 내용을 분석하고 정리하는 컴퓨터 프로그램 등 ) 가 확보되어야 한다.

그러나 정작 정리하려고 해도 정리의 대상이 되는 일차정보가 매우 부족한 상태라는 것이 더 근본적인 문제이다. 요즈음 인터넷 ( Internet ) 에서 유행하고 있는 웹 ( World Wide Web 의 약칭 ) 을 통해서 국내 사이트 ( site,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컴퓨터 또는 집단 ) 를 돌아다녀 보면 자료가 매우 부실하다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다.

일차정보의 생산이 부진한 요인으로는 기록문화의 부재, 정보를 나누려는 정보 마인드의 부족 을 들 수 있다. 우리민족에게 특별히 부족한 기록문화에 대하여 문학평론가 도정일 교수는 그의 책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에서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 다소 길지만 명문이므로 중략하지 않고 싣는다 )

억압되어 들리지 않는 목소리의 복원이 아니라면 문학은 무엇인가 ? 권력의 횡포, 제도의 폭력, 사회관계의 억압 밑에서 소리없이 사라져간 사람들의 그 침묵의 언어를 번역해 내는 작업이 아니라면 문학은 무엇인가 ? 갈등과 고뇌, 시련과 고통, 죽음과 배반의 시대는 있었으되 그 시대의 경험은 우리의 척박한 기억력, 그 심오한 망각의 늪에 빠져 흔적도 없이 사라져가고 있다. 서사란 종족의 기억이고 그 기억의 보존을 위한 첫번째 장치이다. 서사를 통해 역사적 기억을 보존하지 않은 민족 치고 자랑할 만한 문화를 일군 민족은 없다. 그런데 우리는 어찌된 일인가. 우리는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역사를 기록해 온 민족이면서 기억과 반성의 능력은 천박하기 짝이 없고, 서사에서 역사를 증발시키고 기억을 잡아빼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유행논리에 휘둘리기까지 한다. 외솔 최현배가 <천박한 낙천성>이라고 부른 어떤 특성이 우리에게 있는 것인가.

정보부재 현상의 또 하나의 원인인 정보를 나누려는 정보 마인드의 부족은 우리 사회가 오랬동안 정보유통을 금기시하는 경향이 있었음에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열린 공론의 공간이 없기 때문에 자연히 우물가에서 유통되는 유언비어나 요정에서 유통되는 비밀 첩보에 의존에 살아왔던 것이 우리의 모습이었다. 한국 현대사에 그늘을 드리웠던 무소불위의 기관 이름이 '중앙정보부' 였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강력한 내외의 통제를 받는 방송, 재벌언론사와 언론재벌사만이 존재하는 언론시장, 컴퓨터 통신마저 검열하여 사람들을 구속하는 정보기관. 이것이 21세기를 불과 6년 앞둔 한국의 슬픈 자화상이다.

그런 와중에 얼마전에는 통신윤리 강령이 만들어 졌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미국 등지에서도 통신 검열에 대한 논의가 열기를 띠고 있다. 사용자들이 음란, 외설 자료를 유통시키는 것을 막기위해 검열을 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것이 일부 사람들의 주장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에는 두가지의 함정이 있다.

첫째는 통신검열이 과연 가능한 가 하는 점이다. 이미 백만을 돌파한 국내 피씨 통신 사용자들이 동시에 자료를 올리고 대화방에서 대화를 나누고 전자편지를 주고 받을 때 그 엄청난 양의 자료는 어떤 방식으로든 검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설령 가능하다고 할 지라도 엄청난 인적자원을 투자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많은 자원을 투자해서 검열함으로써 얻는 이익이 그 자원의 낭비를 능가할 것인가 ?

통신검열의 두번째 함정은 기준을 어떻게 설정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지금은 거의 없어졌지만 10여년 전만해도 만화에서는 한방에 남녀가 둘만 같이 있는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고 한다. 아이들이 보는 만화에 그런 그림이 있는 것은 불건전한 남녀관계를 연상시키므로 불가하다는 것이 그 논지인데 지금 생각하면 우습기도 하고 그런 기준을 만들어낸 어른들의 불건전성이 나를 몸서리치게 한다. 무엇이 반사회적이고 무엇이 불건전하다는 말인가 ? 그리고 반사회적이거나 불건전한 정보는 과연 꼭 규제되어야 하는 것인가 ?

이런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얼마전에 있었던 야한 연극에 대한 논란을 되새겨 볼 만 하다. 내용의 전개상 꼭 필요하지도 않은데 마구 벗어대는 연극이 있어서 비난이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그 연극은 발디딜 틈 없을 정도록 많은 관객을 유치하였다. 이 현상을 표현하는데 '음란한 사회 근엄한 공권력' 이라는 말만큼 적절한 것도 없을 것이다. 이 말의 두 항 즉, 음란한 사회와 근엄한 공권력은 대립항이 아니라 상호의존하는 항이라는 점에 유의하여야 한다. 개인에 대한 공권력의 폭력이 일상화된 사회, 정의가 없어진 사회, 생활세계에 대한 무제한의 착취를 통해서만 유지되는 사회, 폭력을 부추키고 미화하는 사회에서 개인은 일탈의 유혹을 느끼고 이는 이 사회의 개개인을 '엿보는 톰 ( Peeping Tom )' 으로 전락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제 열어야 한다. 눈도 열고 마음을 열고 시장도 열어야 한다. 나와 남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보지 않으면 어떤 발전에 대한 의지도 발현될 수 없다. 고슴도치처럼 움추러져 자기 것은 내놓지 않고 주변을 사람들만 찌르는 사회에서는 발전이 있기가 어렵다. 여기서 최병권 기자가 쓴 '세계시민 입문'의 한 구절을 인용해보자.

고슴도치 사회에서는 영웅이 태어날 수 없다. 영웅의 탄생이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영웅이 없으면 신화도 없다. 영웅과 신화가 없는 사회는 소인들의 사회이다. ( 중략 ) 신화는 픽션이다.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뛰어넘어 신의 세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염원이 픽션의 형태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중략) 신화 속의 거인을 닮고자 하는 욕구가 크면 클 수록 인간의 자기 극복 노력도 치열해진다. 이 치열함이 학문과 과학 예술 정치 경제 사회 제도의 발전을 가져왔다.

올바른 정보마인드를 길러내기 위해서는 최대한의 자율을 보장하고 자정능력을 키우도록 해야한다. 스스로 판단해도 행동하지 않는 개인에게 세계화, 정보화는 남의 얘기일 뿐이다.

posted by 신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