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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12.12 :: 인간 2.0 (1)
  2. 2011.07.29 :: 인간 2.0 또는 stage real
책을 얘기한다 2011.12.12 15:05
시골의사 박경철 원장이 강연을 할 때면 자주 인용하는 글이 있다. 케인즈가 쓴  “우리 후손의 경제적 가능성"(Economic Possibilities for our Grandchildren)이라는 글이다. 이 글은 1930년에 씌어졌다. 1930년이라고 하면 수많은 소설, 영화의 소재가 되었던 그 악명 높은 대공황이 있었던 시기다. 미국 사람들은 전례없는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그런 시기에 케인즈는 이때까지의 상황과 지식에 견주어 볼 때 100년 이내에 4~8배 또는 그 이상의 성장을 이룰 것이라는 대담하고도 낙관적인 전망을 한다. 하지만 이는 글의 요지가 아니다. 곧바로 케인즈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이게 득이 되나? 삶의 가치에 대하여 믿기라도 한다면 어쩌면 득이 될 가능성이 열릴지도 모르겠다. (Will this be a benefit? If one believes at all in the real values of life, the prospect at least opens up the possibility of benefit.)

지금보면 어쩌면 시시해 보일 수도 있지만 실업자들이 길거리를 메우고 있던 시절에 경제성장이 이뤄진 이후에 벌어질 비참상에 대하여 예견한 그의 통찰은 놀랍다. 어쩌면 우리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나 "월가를 점령하라"는 얘기까지 터져나오는 현재의 상황을 보지 않았다면 케인즈의 통찰을 어떤 늙은이의 망상이라 느끼고 있지 않을까?

잠시 시계 바늘을 거꾸로 돌려보자. 시장을 중심으로한 교환이 일반화되기 이전의 경제에서는 분배는 무척 노골적인 문제였다. 가끔 텔레비전의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지금도 원시사회 풍속을 유지하고 있는 오지의 사람들을 보면 사냥에서 잡은 고기를 공평하게 나누는 행위가 무척 중요한 사회적 행위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분배가 늘 만족스러울 수는 없는 법. 특히 공동체가 커지면 커질 수록 불만은 커질 수 밖에 없다. 이에 분배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수단으로 계급이 사용되고 하층 계급이 분배에 갖게 될 불만을 억누르는 수단으로 지배층은 종교를 이용했다.

백성의 들끓는 거대한 욕망 그걸 만나면 공포에 질리게 된다. 왜? 그 욕망들이 모두 이루어질 수 없으니까. 왜? 그 욕망들이 모두 한꺼번에 풀어지면 세상은 지옥이 될 테니까. 그것을 제대로 만난 것은 바로 진시황. 그는 강력한 법률로 천하를 다스리려 했다. 하지만 그걸로 되지 않아. 해서 공자와 맹자가 필요한 것이고 또 주자가 나온 것이다. 그 무섭고도 거대한 백성의 욕망을 다스리기 위해. 서역 대진국이 기리사독교를 국교로 삼은 것도 삼한과 고려가 불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은 것도 모두 그 욕망 때문이었어. 불교도 유학도 서역의 기리사독교도 모두 이름만 달리 했을 뿐 욕망 통제 체계에 다름이 아니었다.
 --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 중 정기준의 대사 

하지만 꾸준한 생산성의 향상으로 우리는 배고픔에서 벗어나고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고 부자가 되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 시대로 접어들었다. 우리가 어렸을 때만 해도 돈은 있으면 좋은 것이지만 돈을 좇아 뭔가 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서 하는 일 즉, “직업"을 “호구지책"이라 부르며 자신의 일을 비하하곤했다. 돈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변한 것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은 키요사키의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가 베스트 셀러가 된 것과 모 카드회사의 광고에 김정은이 나와서 포근한 눈이 내리는 속에 서서 “부자 되세요~”라고 외친 것이다.

경제의 성장은 끝이 없고 누구나 노력하면 부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시절 심지어는 더 이상 생존을 위하여 생산성을 높일 필요가 없는 시대에 이르렀다. 이에 후쿠야마는 성급하게도 “역사의 종말"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교회에서 헌금 액수가 믿음의 척도로 일반화 된 것도 이와 궤를 같이 한다.

그...런...데... 

우리는 부자가 되었나? 꼭 부자는 아니라도 먹고 살게는 되었으니 행복해졌는가?

어제는 주말이라 짬을 내어 차를 정비하러 갔다가 중고차 매매 일을 하는 아는 동생을 만났다. 겨울은 비수기라 좀 한가하단다.

나: 그래? 그럼 봄 되서 날 풀리면 매기가 살아나는가?
아는 동생: 아무래도 그렇지요. 그래도 예전 만 못해요. 신학기가 되면 대학생들이 차를 사러 와서 경차는 시세도 50만원 쯤 오르고 차 세워 두기가 무섭게 빠졌는데 2~3년 전부터는 그게 없어졌어요.

등록금 천만원 시대. 그렇게 비싼 돈 내고 공부해봤자 졸업해서 88만원 세대가 되는 요즘 세대의 아픔이 여기서도 느껴진다. 그것 뿐인가? 전세계를 휩쓸고 간 99%의 저항은 또 어떤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케인즈의 질문으로 돌아가야 한다. 삶의 가치. 인간이 인간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역사는 종말을 맞이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장 즉, 역사 2.0이 시작된 것이다. (강증산이 얘기한 후천개벽이 이런 건가?)

역사 2.0은 그 이전과 무엇이 다를까? 인간의 본성에 대한 재발견 즉 르네상스가 일어나야 한다. 지난 시기 역사의 정점을 이룬 체계는 시장이다. 시장은 자신의 이익을 최대화 하려는 사람들의 이기심이 만나 평형을 이루는 체계다. 산업혁명 이래 우리는 세상이 영원히 진보할 것이며 개발이 곧 발전이라는 자유주의에 심취하였다. 어떤 이는 인민을 어떤 이는 민족을 또 어떤 이는 부르주아를 그 개혁의 주동세력으로 내세웠다는 점에서 사소한 차이가 있을 뿐 20세기의 중심에 있었던 사회주의, 자유주의, 보수주의는 본질적으로 같은 기제였다고 일찌기 월러스틴은 "자유주의 이후"에서 정리한 바 있다. 역사 2.0은 이러한 이전 시대가 갖고 있었던 전망 자체를 뛰어 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인간관계에 관한 담론을 중심으로 사회적 관점을 정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제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사회변혁의 문제를 장기적이고 본질적인 재편과정으로 접근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야말로 정치혁명 또는 경제혁명이나 제도혁명 같은 단기적이고 선형적인 방법론을 반성하고 불가역적 구조변혁의 과제를 진정으로 고민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 신영복 "강의" 중에서 인용

결국 케인즈와 같은 얘기다. 단지, 그냥 인간이 아니라 신영복은 인간의 "관계"에 좀 더 무게를 주고 있는 점이 다르다. 이러한 질문이 인류 역사에서 지금 처음 제기된 것은 아니다. 예수, 석가모니, 공자, 노자 또는 수많은 인류의 스승들이 준 가르침에서 시대의 한계 때문에 오해된 측면을 배제해나가다 보면 이러한 일체의 "색"의 세계가 무의미해진 시점에서 우리를 끌고 가는 방향타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한 실험적이고 선구적인 생각이 "교회나 절간이나 소규모 공동체 안에 갇혀있을 것이 아니라" 현실의 중심적인 원리로 도입되고 이것이 인류의 탄생 이래 지속되어온 무척 오랜 체제을 넘어서는 최초의 진정한 체제가 될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고 더 늦출 수도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기심과 이기심이 벌거벗고 충돌하는 사회에 백년 넘게 노출된 인류에게는 그 외의 생각을 생활의 원리로 받아들이자는 것이 무척 생소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주위을 잘 둘러보면 우리는 이미 그런 세상에 살고 있었다. 단지 눈여겨 보지 않았을 뿐.

미안하지만 여러 경제학자분들께서는 실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것 같습니다. 저는 금속 공학 박사 학위를 소지하고 있고, 고베 철강에서 지난 30년간 일한 덕에 철강 제조에 대해 제법 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 저도 회사 규모가 너무 크고 복잡하기 때문에 회사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반 정도 이해하면 다행입니다. 회계나 마케팅 분야 출신의 다른 임원들은 거의 아무것도 모른다고 해야 하겠지요. 그럼에도 이사회에서는 직원들이 올린 사업 계획을 대부분 받아들입니다. 직원들이 회사를 위해서 일한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지요. 모든 사람이 자기 이익만을 추구한다고 가정하고 직원들의 동기를 사사건건 의심하기만 한다면 회사는 마비되고 말 겁니다. 이해하지도 못하는 사업계획을 검토하려고 애만 쓰다가 말 테니까요. 고베 철강이든 정부든 간에 모든 사람이 자기 이익만을 위해 행동한다고 전제하면 대규모 관료 기구를 운영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 장하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이미 우리 사회는 사람들의 본성에 숨어있는 정직, 이타심 또는 관용 덕분에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우리는 이기심이 드러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을 뿐이다. 자기만을 생각하는 좁은 이기심을 넘어 모두의 이익을 추구하는 넓은 이기심(= 정직, 이타심, 관용)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를 믿을 수 있는 틀 그리고 그러한 상호 협력을 통해 내가 보상받을 수 있다는 희망이 필요하다.

대개의 사람들에게는 생소하겠지만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 대신 사용할 수 있는 운영체제로 리눅스라는 것이 있다. (컴퓨터는 대략 하드웨어 + 운영체제 + 앱으로 구성되며 운영체제는 하드웨어에서 앱이 돌아갈 수 있도록 기반이 되는 소프트웨어를 말한다.) 현재 시중에서 팔리는 스마트폰 중에서 애플에서 나온 아이폰을 제외한 나머지는 거의 안드로이드 폰인데 이것도 모두 리눅스를 운영체제로 사용한다. 리눅스는 놀랍게도 공짜이며 처음 만든 리누스 토르발즈와 전세계에 흩어진 수많은 자원봉사 개발자의 합작품이며 현재도 놀라운 속도로 발전을 계속하고 있다. 서로 얼굴 한번 본 적이 없는 수많은 개발자들이 돈도 받지 않고 운영체계 개발이라는 엄청난 일을 해낸 것은 프로그래머들 사이에서는 실로 놀라운 사건이었고 에릭 레이먼드는 왜 이런 일이 가능한지 분석하여 “성당과 시장”(The Cathedral and the Bazaar)이라는 에세이를 썼다. 레이먼드는 이러한 아름다운 협력이 가능한 몇 가지 원리를 그 에세이에서 제시하는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개발에 참여함으로써 자기 만족을 얻으리라는 전망에 자극 받았고, 그들이 하는 일이 계속해서 (어떤 때는 날마다) 향상되고 있다는 것이 보답이 되었다.

이타심 또는 관용은 자신의 생존에도 유리하기 때문에 유전자 깊숙히 새겨져 있는 것이지만 그러한 행동이 자신의 안전을 보장하고 보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전망을 주어지지 않는 한 발휘되기는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마침 인류는 참으로 복이 많다. 왜냐하면 인터넷이 있으니까. 컴퓨터가 있으니까. 인터넷이나 컴퓨터는 관용을 쉽게 발휘할 수 있게 사람과 사람을 매개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행동을 전 지구적으로 조직할 수 있게 하고 그 결과를 바로 확인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미디어 분야에서 가장 주목 받는 젊은 학자인 클레이 셔키(라고 쓸까 아니면 “내가 제일 좋아하는 대머리 학자 클레이 셔키”라고 쓸까 고민을 한참 했다.)는 전세계 사람들을 24시간 연결해주는 정보기술이 인지 잉여(cognitive surplus)를 낳았다고 설명한다. 예를 들어, 재미난 사진이 하나 올라오면 이를 이용한 합성 사진이 수천 수만장 쏟아지는 현상이 인지 잉여가 발휘되는 가장 간단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누리꾼은 이런 현상을 흔히 “잉여력" 또는 그냥 “잉여"라고 쓰기도 하는데 가끔은 경멸적 의미로 쓰기도 하므로 정확히 같은 의미는 아니다. "짜식 잉여력 쩐다"라고 하면 "와 대단한데"라는 의미와 "몹시 할 일이 없구나"라는 의미가 동시에 있다.)

클레이 셔키는 인지 잉여가 관용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공동의 가치(같은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서로 이득을 보는 것)는 물론이고 사회적 가치(같은 활동을 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그 외의 모든 사람에게도 이익이 되는 것)를 낳을 수 있다고 한다. 그가 예로 들었던 것은 유샤히디라는 사이트이다. 이 사이트는 케냐의 2007년 대통령 선거 후 발생한 인종간 갈등으로 수많은 폭력 사태가 벌어지자 이런 상황을 정리해서 지도에 보여주는 간단한 서비스로 두 프로그래머가 만든 것이다. 이후 이를 이용해서 멕시코에서는 부정 선거를 고발하고 워싱턴 DC에서는 제설 상황을 공유하고 아이티에서는 지진에 따른 피해를 집계하는 도구로 활용하였다. 각 지역에서 자기 지역에서 일어난 일을 그 사이트에 올리는 것은 무척 간단한 일이지만 이것을 누군가 중앙에 앉아서 사람들을 풀어서 그런 정보를 모으려면 거의 불가능할 수도 있다. 인지 잉여와 그런 잉여가 발휘될 수 있는 간단한 도구가 결합함으로써 엄청난 시너지를 내는 것이다.

위키피디아는 또 어떤가? 누가 돈을 주는 것도 아닌데 그리고 누가 앉아서 일일이 편집을 해주는 것도 아닌데 몇년 만에 “저절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보다 더 자료도 많고 더 정확한 백과 사전이 생겨나지 않았는가?

위의 사례는 누군가의 잉여력으로 많은 사람이 혜택을 보는 것이지만 스스로에게도 큰 혜택이 돌아오게 만든다면 더 좋지 않을까? 이런 아이디어를 보여주는 가장 멋진 프로젝트는 듀오링고(Duolingo)다. 카네기 멜론 대학의 연구진들이 만들어낸 이 멋진 프로젝트는 “세상에 좋은 컨텐트가 많은데 다른 언어로 다 번역하려면 돈과 시간이 너무 많이 든다"라는 문제와 “다른 언어를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아주 많다"라는 사실을 결합해서 컨텐트를 번역하는 행위를 통해 새로운 언어를 배울 수 있도록 하는 사이트를 만들었다. 이런 식이다. 영어를 배우려는 한국 사람이 많이 있다고 하자. 그리고 영어로된 위키피디아를 한국어로 번역하고 싶다고 하자. 그럼 우선 컴퓨터가 제대로 된 번역을 알고 있는 문장 하나와 모르는 문장 하나를 사용자에게 보여주고 번역을 해보라고 한다. 만약, 사용자가 컴퓨터가 답을 아는 문장을 정확하게 번역했다면 나머지 한 문장도 정확한 번역일 가능성이 많다. 그리고 이를 충분히 많은 수의 사람에게 같은 문제를 풀게 하면 정확한 번역이 무엇인지 몰랐던 문장의 번역을 (충분히 높은 확률로) 컴퓨터가 알 수 있게 된다. 그럼 문장 하나가 번역된 셈이고 컴퓨터 입장에서는 문제를 낼 때 써먹을 수 있는 “답을 아는" 문장이 늘어난 것이다. 이런 식으로 반복을 하다 보면 어느덧 엄청난 양의 문서를 번역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에 참여한 사람들은 영어를 배우는 일석이조의 결과가 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황당할 수도 있지만 사람들이 “충분히" 많고 그들을 잘 연결할 수 있는 정보 기술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사회적으로 이롭고 스스로에게 혜택이 돌아올 뿐 만 아니라 돈까지 생긴다면 어떨까?

예를 들어, 누군가 자가용 자동차의 하루를 살펴본다면 무척 심심할 것이다. 거의 항상 주차되어 있으니까. 만약 많은 사람들이 자동차를 공유한다면 자동차의 활용도를 높일 수 있다. 자동차 공유 서비스인 “집카"는 충분히 많은 (하지만 회원 수 보다는 훨씬 적은) 자동차를 도시 전역에 깔아놓고 인터넷을 통해 예약하면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차의 위치를 알려주고 차를 이용한 뒤 주차를 하면 다시 인터넷에 주차된 위치가 등록되는 식으로 상당히 편리하게 차를 빌려 탈 수 있게 하였다. 이를 통하여 이 서비스는 엄청난 수익을 올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도 자가용을 보유하는 것 보다 훨씬 싸게 먹히니 서로 이득이다. 더 중요한 점은 사람들이 차를 이용하는 행태를 돌아 보게 된다는 점이다. 그냥 차가 있으니 쓰는 것이 아니라 필요할 때 빌려서 쓰다 보니 사용을 더 계획적으로 하게 되고 걷는 비율이 늘어나는 등 생활 양태까지 바꾸고 있다.

“에어비앤비”는 집에 있는 빈 방을 활용하여 수입을 올리고 싶은 사람과 방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연결해주는 서비스다. 100개가 넘는 나라에 1만개가 넘은 방이 등록되어 있으며 많은 거래가 이뤄졌지만 도둑질은 하는 경우는 전혀 없었으며 예약 해놓고 안 온다거나 방이 깨끗하지 않은 등의 문제는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회원들 사이에 평판이 나빠지면 다음 거래에는 불리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 이런 사례는 어떤가? 좋아 보여서 샀지만 더 이상 필요 없는 물품은 다들 있기 마련이다. 그냥 버리긴 아까운데 필요로 한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고 더구나 가격을 매기기도 힘들다.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것과 바꾸면 어떨까? “스와프트리"는 이런 사람들을 위한 사이트이다. 워낙 많은 회원들이 있다보니 전혀 거래될 수 없을 것 같은 것도 결국은 짝을 찾아 거래되곤 한다.

이와 같이 서로 협력하여 소비함으로써 덜 생산하고도 원하는 것을 소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협동 소비" 트렌드를 많은 사례와 함께 상세히 소개하고 있는 책 “위 제너러이션"의 저자인 레이첼 보츠먼은 사람들이 원래 선한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실천을 마찰이 없고 재밌게(frictionless and funny)만 만들어 주면 된다고 한 바 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세상을 변혁한다는 것은 생명을 걸어야 하는 비장한 싸움이었다. 하지만 김어준이 "닥치고 정치"에서 지적하였듯이 이런 새로운 생활 양태를 정보기술과 결합하여 누구나 참여할 수 있고 재미있게 꾸민 다음 이것이 "더 쿨하고 더 편하고 더 유리한지 마케팅"해야 할 시대가 된 것이다. 뭐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목숨을 걸어야 하는 비장함까진 필요하지 않으니 다행 아닌가?

이전에 유토피아 공동체를 시작했던 사람들은 오래된 공동체를 떠나서 새로운 공동체를 시작하는게 최선이라고 주장했고 그래서 자주 실패했다.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는 건 공동 라이프스타일을 반문화가 아니라 문화의 일부로 만드는 것이다. 
-- 레이첸 보츠먼과 루 로저스 "위 제너레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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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묘군
세상을 얘기한다 2011.07.29 13:25
인간관계에 관한 담론을 중심으로 사회적 관점을 정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제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사회변혁의 문제를 장기적이고 본질적인 재편과정으로 접근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야말로 정치혁명 또는 경제혁명이나 제도혁명 같은 단기적이고 선형적인 방법론을 반성하고 불가역적 구조변혁의 과제를 진정으로 고민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신영복의 「강의」중에서

이 구절에 대하여 후배가 던진 질문에 답한다.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 보면 우리를 옥죄는 굴레를 벗어나 풍요를 누리고자 끊임없이 투쟁한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불을 사용하고 농사를 발명하고 사회제도를 만들고 증기기관을 발명하기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노력은 계속되었다. 물론 시대에 따라 그러한 노력을 이끌어내는 주도 집단의 이름은 족장, 왕, 귀족, 영주, 토호, 자본가 등으로 바뀌었지만 이 구도에는 변화가 없었다고 봐야 한다.

늘 그 시대를 풍미하는 레짐(정)과 그에 대항하는 레짐(반)은 새로운 레짐(합)을 낳았지만 그 어느 레짐이건 풍요를 최대화 한다는 목표는 달라진 적이 없고 단지 그 풍요가 누구의 풍요인가와 풍요를 강요하는 메커니즘의 정당성이 어디서 (하늘, 신, 다수결 등) 오는가가 바뀌었을 뿐이다. 월러스틴이 지적하듯 심지어 사회주의/공산주의라는 것도 시장주의/자유주의/자본주의라는 것과 이러한 점에서는 전혀 다를바가 없다.

생산성이 인류를 몇 번 씩 먹여 살리고도 남게 된 시점. 현재의 생산 방식으로는 모두가 아주 빠른 시일 이내에 공멸할 것이라는 것이 분명해진 시점. 즉, 더 이상 풍요가 추구의 대상이 아니라 "주어진 것"이 된 시대에 우리의 삶을 관통해야 할 원동력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제기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질문이 인류 역사에서 지금 처음 제기된 것은 아니다. 예수, 석가모니, 공자, 노자 또는 많은 스승의 생각에서 시대의 한계 때문에 오해된 측면을 배제해나가다 보면 (예컨대, *복음교회에서 얘기하는 3박자 구원론을 보라. 하늘을 찌르는 고딕풍 교회나 거대한 불상을 보라. 자본주의 또는 자유주의를 종교라 부르는 사악한 독사들 말이다.) 이러한 일체의 "색"의 세계가 무의미해진 시점에서 우리를 끌고 가는 방향타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 심지어는 이러한 이상적인 생각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또한 국지적으로 이러한 이상을 지상에 실천한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작은 규모의 종교 공동체)

하지만 이제는 그러한 실험적이고 선구적인 생각이 현실의 중심적인 원리로 도입되고 이것이 인류의 탄생 이래 지속되어온 무척 오랜 레짐을 넘어서는 최초의 진정한 레짐이 될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고 더 늦출 수도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신영복 선생의 질문은 결국 이 질문의 답은 인간과 인간이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에 대한 공자의 통찰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제목에 있는 stage real은 영화 "아발론"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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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묘군